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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최성묵 목사.
나그네처럼 살아야한다
탁 터져서 장비 없이 빈손으로
많이 모은 소유는 오직 우리 발꿈치에 무거운 것
원하거든 쓰러지도록 소유하라
우리는 버리고 가리라
작은 것을 만족하며
부득이한 것만을 한 손에 움켜쥐고

(고 최성묵 목사의 설교유고와 함께 있던 테르스 터겐의 시)


따뜻한 봄 햇살이 눈부시던 25일 오후 3시,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의 중부교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예배가 열렸다.

책을 구입하러 온 사람들로 책방 골목이 북적이는 가운데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교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 있는 자그마한 교회. 교회 입구에선 '고 최성묵 목사 15주기 추모 예배'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산들바람에 나부꼈다.

▲ 교회 입구의 플래카드.
ⓒ 황석하

안락한 삶을 포기한 부산 민주화운동의 상징

예배 시작 직전 예배당 내부에선 엄숙함과 정겹게 서로 인사하는 교인들의 모습이 교차했다. 중앙에 보이는 십자가 옆으로 고 최성묵 목사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5년 전 3월 22일, 부산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던 최성묵 목사는 중부교회 근처 부평동 거리에서 과로로 쓰러져 운명했다.

전 문화부 장관 김성재 목사는 모세와 바울처럼 살다 간 고 최성묵 목사의 삶을 회상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1930년에 태어난 최성묵 목사는 6·25전란부터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1951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주님의 소명을 받고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했다. 이후 연세대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성묵 목사는 마음만 먹으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최 목사가 편하게 학자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민중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되던 암울한 시절, 최 목사는 신학자의 길과 현실참여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국 최 목사가 선택한 길은 고통 받는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진보적 기독학생운동을 이끌었고 1969년 부산으로 와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송기인 신부, 임기윤 목사, 심응섭 목사, 유기선 박사 등과 함께 '정의구현 기독자회'를 결성해 유신에 저항했다. 1977년 최 목사 등이 만든 양서조합은 부산지역 청년대중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1979년에는 부마항쟁의 배후세력으로 몰려 연행됐다가 10·26사건 후 석방됐다.

그러나 그 후 들어선 5공 정권도 최 목사를 모함하고 박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 목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7년 6월항쟁의 파도가 전국을 뒤덮을 때 부산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서 시위의 전도자가 됐다.

"고 최성묵 목사님은 기독학생운동, 에큐메니컬 운동,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사회운동 속의 화살촉'이라고 불렸습니다."

고 최성묵 목사와 운동을 함께 한 박상도 부산YMCA 이사장은 운동할 당시를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 추모예배 직전 예배당 모습.
ⓒ 황석하

"모든 것을 내가 시켰다고 해라"

"지금 생각하면 극적인 에피소드가 정말 많습니다."

박 이사장에 따르면 중부교회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서울에서 발행된 선언문, 유인물 등 이른바 '불온문서'들이 중부교회로 왔다. 그러면 박 이사장은 그것을 등사하거나 필사해 부산 전역으로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명함만한 유인물을 만들어 밤에 공중전화 부스에 붙이는가 하면 버스에서 기습적으로 유인물을 뿌리는 방법으로 당국의 삼엄한 단속을 피하려고 했지만, 종종 학생들이 경찰에 적발돼 연행되곤 했다.

"학생들이 붙들려 가면 목사님이 항상 모든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 연행되면 당신이 모든 것을 시켰다고 하라고 미리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죠."

박 이사장이 얘기하는 고 최성묵 목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목사님은 6·25 때 인민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부마항쟁이 한창일 때는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10·26사건 후 석방되셨죠. 5공 때, 목사님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목돼 한 달간 도주생활을 하시다 서울에서 쓰러지셨고 저는 보안사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고 최성묵 목사는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얼굴을 찡그린 적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을 희생해 불의와 싸웠을 뿐, 추호도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고 최성묵 목사의 삶을 가만히 들려주던 박 이사장은 보수적인 한국의 기독교 교단에 대한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박 이사장은 "많은 교회들이 해방자로서 예수를 잊고 있다"고 일갈하며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촉구했다. 또한 과거에 비해 낮은 대학생의 사회참여에 대해 "취업전선에 내몰리고 있는 대학생들을 이해한다"며 "우리 사회구조를 이렇게 만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책임을 통감한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 골목.
ⓒ 황석하

존경스러운 인물에서 푸근한 아저씨까지

주변 상인들은 15년 전에 작고한 고 최성묵 목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부교회 계단 아래에서 32년 동안 커피를 팔았다는 양윤옥(62)씨는 고 최성묵 목사를 "존경스러운 인물이고 훌륭한 양심가"라고 한마디로 설명했다. 또한 양씨는 최 목사가 한창 운동을 할 때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도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시위 중 경찰에 쫓겨 교회로 도피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수시로 전경들이 교회를 에워싸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때 노무현 대통령도 중부교회에 출입했다고 한다.

책방 골목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필(70)씨는 고 최성묵 목사를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로 기억했다. 하루는 김씨가 책을 던지면서 정리하다가 공교롭게도 최 목사가 지나가면서 김씨가 던진 책에 맞았다고 한다. 꽤 아팠을 텐데도 조금도 인상 쓰지 않고 "허허" 웃으며 길을 계속 가던 최 목사를 김씨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김씨는 경찰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한 번도 숨지 않고 연행돼 가던 당당한 지사로서도 최 목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최 목사는 생전에 별명이 여러 가지였다. 가난한 자, 영원한 자유인, 뜨거운 열정, 바보 같은 친구, 장애인의 친구, 머그잔 등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최 목사는 한평생 남을 섬기며 살다갔다. 이는 최 목사가 민주화운동가로서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제자로서 예수처럼 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친 흔적이다. 그래서일까. 땅거미가 지는 가파른 중부교회 계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투영됐다.

▲ 부산 중부교회.
ⓒ 황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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