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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나이로 따지면 윤여군 목사는 노인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어리석은 것만은 확실하다. 젊었을 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노라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판을 전전하다가 감옥에 들락거리더니, 10년쯤은 강화도 교동에서 100년이나 된 작은 교회를 목회했다.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싶더니, 안식년을 기회로 삼아 유기농사를 짓겠다고 강화도로 나왔다.
그의 삶을 대충 훑어보아도 산을 옮겼을 만한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표현대로 "어찌어찌하다" 대안 고등학교에서 농업 교사를 하고,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협의회 회장과 강화시민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있지만 그저 거죽일 뿐이라고 했다.
아내 박상수 사모가 유기농으로 지은 순무와 고추 콩을 가공하는 '손맛식품' 대표이자, 강화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 회장을 맡아 분주하지만 생계와 나눔을 위한 수고 정도로 여긴다. 두 사람은 말 마디마디 "특별할 게 뭐 있냐"며 인터뷰하겠다고 덤비는 기자를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들의 걸음을 캐물으며 언젠가는 일을 낼 것 같은 우직함이 느껴졌다.
'운동' 노동자에서 '농군' 목사로
어릴 때부터 목사를 꿈꾸며 교회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청년 윤여군과 교육자의 길을 걷기를 원하던 박상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시절 데모 현장에서 만났다. 이들은 사회주의 세상이 와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쳤고, 감옥에 다녀오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1986년 대학 졸업과 함께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철을 붙이는 일보다 사람을 묶어내는 일에 더 혈안이었다. 그렇게 5년을 숨가쁘게 달리던 이들은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무너지는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라고 여기던 나라들이 자본주의에 손을 드는 모습에 갑자기 할 일을 잃었다. 운동권들이 겪은 정신적인 공황을 이들도 겪었다.
다시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토기장이 하나님을 묵상했다. 하나님 손에서 질그릇으로 거듭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나날을 보내던 이들에게 한 선배가 강화도 교동의 한 교회를 소개했다. 1901년에 세워진 교회로 40여 명의 교인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교회였다.
"사랑받으면서 목회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살았는데도 교인들이 아들 대하듯 지지해주었으니까요."
윤 목사의 말처럼 교인들은 갓 부임한 풋내기 전도사를 믿어주고 따라주었다. 윤 목사가 강화 지역 시민단체 활동을 한다고 섬을 자주 떠나도 군말 하나 나오지 않았다. 1996년에는 유기농을 해야 한다고 하자, 교인 세 가정이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에 '농' 자로 모르는 목회자가 어디 다녀오더니 하는 소리를, 평생 땅을 갈고 사는 사람들이 들어준 것이다. 예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던진 제자들처럼.
교회를 떠난 적은 없지만 늘 삐딱한 시선으로 살아가는 윤 목사 부부가 한 번 더 곁길로 들어섰다. 10년간의 목회를 접고 2002년 강화도로 나온 것이다. 교인들에게만 유기농사를 지으라고 말할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농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늘 말로만 떠들고 자신은 몸으로 따르지 않는, 섬기는 자라고 하지만 늘 섬김을 받는 목사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싶었다. 부담스러운 교동에서 교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던 경험 덕분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교동을 나온 뒤 2005년까지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며, 수업의 일환으로 학교 농장 4000평을 경작했다. 이 시기 짬짬이 귀농하는 사람에게 유기농업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농사꾼으로 탈바꿈하는 몸 풀기를 한 셈이다.
욕심 버리면 땅이 기쁨 준다
작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농사를 했다. 밭 1900평, 논 1500평 등 3400평을 일궜다. 밭에는 순무와 배추 등을 심었다. 순무는 작황이 좋아 대충 계산해 500만원 정도의 수입을 낼 것으로 내다봤다. 남아 있는 순무 100포대를 다 팔았다고 가정했을 때 말이다.
이들은 집에 가공 공장을 만들어 '손맛식품'이라는 이름으로 된장과 고추장, 강화도의 유기농 쌀로 만든 떡 등을 판매한다. 고추는 서너 번 지었는데 그때마다 실패해서 강원도 양구에서 받아와서 만들고, 콩은 강화도에서 나는 유기농 콩을 쓴다. 고추장과 된장은 강화도 어린이집과 아는 사람들에게 1000만원어치 정도를 팔았다. 논농사는 식량을 하고 조금 남는 수준이다. 놀고 있는 논을 주인과 함께 농사해 나눠 갖다 보니 30가마 정도가 손에 들어온다.
그러니 농사를 지어서 한 해에 네 식구 겨우 먹고 살만큼 번다. 한국 사회의 4인 가구 기준 평균 수입의 반을 밑돈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쓰는 소박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다.
가볍기 때문에 활동도 활발해졌다. 지역 운동 단체와 농촌목회자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지금은 신학교 후배인 강금화 목사와 강화미문교회를 공동목회하고 있다. 강 목사도 제가복지센터를 운영하느라 바빠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다. 바쁜 목사끼리 한 교회를 잘 섬겨보자는 강 목사의 제안에 윤 목사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사례비는 받지 않지만 오히려 마음 편하게 목회할 수 있어 좋다고 윤 목사는 말했다.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된다지만, 농부가 땅이 없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는다. 3∼4년을 정성스레 땅을 일구어 유기농업을 할 수 있도록 가꾸어놓더라도 주인이 내놓으라고 하면 별 수 없이 줘야 한다.
윤 목사는 "땅을 달라고 하면 주면 되지요. 다른 땅 얻어서 지으면 되니까요"라며 태평스럽다. 그는 지력을 회복해 놓은 땅이 주인 손으로 들어가면 다시 농약에 망가질 게 당연한 결과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잠깐이라도 땅이 숨을 쉴 수 있는 기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했다. 땅에 대한 욕심만 버리면 땅은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선물한다고 말한다. 참 세상 물정 모르는, 뜬 구름 잡는 소리다.
그런데 윤 목사처럼 우공(愚公) 종교인 몇 사람이 10여 년 전에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유기농업이 이제 200만평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작은 동산 하나는 옮긴 것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독교 대안 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