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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결혼식장 벽면에 붙은 현수막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예쁘게 주문 제작된 플래카드도 아니고 다우다 천에 직접 손으로 제작한 펼침막이 식장 오른쪽 벽을 장악해서 처음부터 심상찮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머니 한 분이 "결혼식에 플래카드가 뭐여…" 하신다. 게다가 거기에 박혀 있는 글씨도 "아따 거시기 흐게 잘사시요"라고 하여, 애써 찍고 바르고 단장해서 도시 멋을 세우려는 신랑신부의 모습을 한꺼번에 여수 앞바다 진흙 벌에 처박아 버린다.
여기가 결혼식장인지, 집회장인지 모를 현수막이 이날의 분위기, "이것은 결혼식도 아니고 집회도 아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건 주례사도 아니고 정치연설도 아녀..."
신랑이 입장을 한다. 나이 40이지만 아주 젊고 튼튼한 신랑임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회자는 3보 걷고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아주 우직하게 사회자의 요구를 아주 충실하게 따라하는 신랑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신랑신부가 입장하고 본격적으로 '같기도' 결혼식이 진행됐다.
신부와 함께 투쟁하고 있는 이미영씨와 구로공단에서 만난 후배 정찬무씨, 남녀 공동 사회로 예식을 진행하였다.
아주 짧은 주례사 시간에 형식과 내용을 놓치지 않고 재치있게 말씀하신 주례선생의 말씀이 이날 '같기도' 결혼식의 재미를 더했다.
"이건 주례사도 아니고 정치연설도 아녀, 이건 주례사도 아니고 정치연설도 아녀…."
신랑신부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민주노동당 금천지역위원회에서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신부가 기륭전자 농성 천막을 밤새워 지킬 때 신랑이 자주 찾아간 것이 결혼으로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주례는 지역의 최고 선배 격인 최규엽 위원장(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 위원장)이 제격이다. 워낙 빼어난 말솜씨로 알려진 분이었지만, '같기도' 결혼식이라고 사전교감도 없었는데, 내용과 형식을 넘나들며, 대중연설 솜씨로 길눈이 말씀을 이어갔다.
"결혼식 끝나고 오늘 한미FTA 반대 국민대회에 꼭 참석하라"고 말씀을 시작하더니…, 부부간의 한 달 총화를 통해 반성하는 시간을 꼭 가지도록 하라고 당부하더니…, 이성 간의 사랑과 가족 간의 사랑보다 귀한 동지간의 사랑을 설파했다. 나아가 유관순 누님 말씀을 하시면서 사회와 역사를 바꾸면서 이루는 '사회정치적 생명'까지 설파하시니….
여기가 사회운동의 철학과 자세를 강연하는 곳인지 결혼식장인지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하객들은 누구도 지루해 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들었다는 거∼ 그러니 '이건 주례사도 아니고 정치 연설도 아녀'하는 '같기도' 결혼식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건 결혼식도 아니고 집회도 아녀..."
오늘 결혼식을 위해 직접 노래를 만들고 불러준 가수 김성만, 하객을 하나로 모으는 열창을 불러준 가수 지민주. 그 노래에 맞춰 어깨동무(스크럼을 짜고)로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하객들. 살짝 부끄러워하는 조신한 모습을 팽개치고 손잡고 노래에 몸을 흔들고 있는 신랑 신부. 모두가 준비하고 함께 참여한 처음 보는 재밌고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같기도' 결혼식을 만든 주역은 집회 사회로 단련된 여성 사회자였다. 대충 봐도 '같기도' 신자가 분명해 보이는 여성 사회자는 팍팍 터져 나오는 언어의 테러로 사정없이 '같기도' 결혼식을 연출했다.
케이크 커팅이 아닌 "케이크 절단!"이라며 다만 영어 사용을 자제한 것이라는 말은 애교로 넘길 수 있었다. 신부가 한 칼, 한 칼 절단한다고 하여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도 그냥 그런 대로 넘길 수 있었다(기륭전자 정문을 지키는 용역 대장의 별명이 얼굴에 칼자국이 있어 '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점은 신랑 신부가 케이크에 있는 '체리'를 입을 사용해서 둘로 나누는 신기를 연출할 때 사진을 찍기 위해 앞으로 달려온 사진사들을 '찍새'라고 하여 '짭새'와 '개새'에 이어 가장 혐오감을 주는 단어이자 적개심이 묻은 단어로 사진기자들을 무참히 테러함으로써 같기도 결혼식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건 결혼식도 아니고 언약식도 아녀..."
신부친구들의 사진발에 신랑친구들이 찬밥이 되어 배도 고프고 기다림에 지치고 그래도 사진으로 흔적을 안 남기면 두고두고 원망일 것도 같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지막 하이라이트 신랑신부 친구들 기념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때가 결혼식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이자 모든 결혼이 그 결혼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연을 낳는 것임을 보여주는 부케 받기 순서가 있다. 벌써 세 쌍의 결혼식으로 '결혼에 목마른 자는 기륭 연대 투쟁으로 와라'라는 전국적 명성을 획득한 기륭분회인지라, 다음에 누가 부케를 받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부케 받으러 나온 이가 남성이다. 기륭전자 분회 투쟁에 물심양면으로 함께 했던 디질털산업단지의 천지산업지회 유현재 사무장이 낙점을 받은 것이다.
유현재 사무장이 나와서 부케를 받기 전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에서 뱅뱅 도는 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민주노동당 금천지역위의 최O희 위원장이 "강화숙 나와라!"로 분위기는 확 뜨거워지고 또 확 차가워졌다. 그런데 결국 앞으로 나온 여성에 의해 차가운 기운은 갑자기 소멸되고 봄꽃 같은 뜨거운 기운만 충만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가 공식 출발을 한 것이다.
여기서 이름을 첫 번째로 연호하여 두 사람의 인연 줄을 꿰는 선구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흐뭇했던 최O희 위원장의 후일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술자리에서 자기의 선창이 큰일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다가 구박이라는 직격탄을 맞고 기절을 한 것이다. 원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두 사람 관계였지만, 남성이 부케를 받고 그 힘으로 그 자리에서 직접 '청혼'을 하려 한 것인데…. 그 역사적 기회를 몇 초를 못 참아서 참혹하게 앗아간 '경망의 죄'를 범한 것이라는 규탄에 흐뭇함에서 황당함으로 급전 직하된 최O희 위원장도 "이건 인연의 부추김도 아니고 훼방도 아녀"라는 '같기도' 신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순식간에 당일 신랑신부보다 더 많은 주목과 축하를 받은 이 새로운 연인에게 쏟아진 바 '같기도' 주문은 "이건 결혼식도 아니고 언약식도 아녀"였다. 어쨌든 이날 결혼식에 참여한 신랑신부들 친구들은 주례사의 말씀 따라, 한미FTA 저지 범국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시청으로 독립문으로 달려가 촛불시위까지 참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