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장 최악의 방송 프로그램을 뽑으라면 불륜 드라마보다 <사랑의 리퀘스트>나 <인간극장>을 꼽는다. 물론 이렇게 지적하면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어떻게 가장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꼽히는 이들 프로그램을 최악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고. 차라리 ‘수다 떨기’나 가학성 우스개로 전파를 낭비하는 프로그램이 더 나쁘다면 나쁜 것 아닌가.
그러나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딱지는 오히려 더 나쁜 프로그램이 되게 한다. 소모적인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는 높다. 보면서도 주의를 한다. 하지만 좋은 프로그램이라 규정된 프로그램은 전적으로 모든 내용들이 타당한 것으로만 여기게 한다.
<사랑의 리퀘스트>나 <인간극장>은 불행을 감동으로 상품화하는 프로그램들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고통과 불행의 경연장이 된다. 웬만큼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워서는 선정이나 채택이 되지 않는다. 질병이나 장애, 불우한 환경, 가족의 죽음 등이 우선적으로 선정 요건이 된다.
자신의 그늘을 드러내고 싶은 이들은 많지 않다. 희한하게도 장수하는 프로그램이 될수록 그 불행과 불우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이른바 감정의 내성이 생겨서 웬만한 내용에서는 감동도 눈물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적 구성을 위해 좋은 대상자를 중심으로 선정한다. 이 때문에 도움이 절실한지 여부는 부차적이 된다. 별다른 ‘꺼리’가 없으면 제외되는 것이다.
'감동 저널리즘'의 발동
이것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감동의 주인공은 다른 산업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영화, 광고, 출판사들은 이들을 주인공 삼아 각종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들을 돕는 것에서 자신이나 단체의 정체성이나 역할을 찾는 이들도 많다. 각종 매체들은 그들을 주인공으로 수없는 관련 기사들을 내보낸다. 일종의 ‘감동 저널리즘’의 발동이다. 이 과정에서 과장과 허위는 정당화된다.
‘감동’이라는 명분은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정작 당사자들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어도 미담인 바에야 항의하지 못한다. 명예훼손은 있지만, 명예 과장죄는 없다. 사실을 감동적으로 왜곡해도 방송 심의에는 저촉되지 않는다. 얼마 전 목도리녀의 당사자는 허위사실을 보도하는 언론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물론 명예훼손은 없으므로 이슈화되지 않는다.
산골 소녀 영자씨의 경우에는 더 불행한 결말이 되었다. 최근 기봉씨의 후원금 문제도 결국 방송과 매체의 감동 저널리즘 덕(?)에 발생했다. 감동 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치명성은 난데없는 돈을 개입시키는 데 있다. 금전적 욕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프로그램 출연은 큰돈을 연상시키게 만들고 있다. 일종의 방송 출연 대박 심리다.
무엇보다 최악은 방송출연으로 부자가 된다는 인식을 주는 데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금전적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본래 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런 돈의 집중은 견물생심의 심리를 폭증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결국 방송 출연과 개입=행복 달성이라는 이미지가 도식화되었기 때문에 방송 출연 이후가 걱정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감동 저널리즘뿐만 아니라 솔루션 혹은 코칭 프로그램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마치 이 프로그램들이 개입하면 행복이 찾아오는 것 같이 다루지만 정작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을 수밖에 없다.
방송 이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심을 둔다고 해도 잘된 사례만 모아 자신들의 방송 홍보에만 사용한다.
이제라도 방송이 그들의 삶에 개입해서 과연 행복해졌는지 종합 조사가 필요하다. 그 조사에 따라 방송 개입 후에 더 불행해졌다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감동을 상품화하는 프로그램들은 재고해야 한다. 무엇보다 각종 매체 종사자들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감동이라는 상품을 둘러싼 상품화 시스템에도 큰 원인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진정한 감동은 많지 않다. 그것을 대량 생산해내려고 하니 얼마나 억지스럽고 작위적이 될까.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을 터이다. 또한 작위적이고 과장된 허위의 극적 감동에 대한 심의기준도 마련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