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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담'
'퀴담' ⓒ 오마이뉴스 권우성
봄비답지 않은 봄비가 내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트렌치코트 차림에 우산을 쓴 채 무대에 등장하는 퀴담을 환영하려는 듯 '태양의 서커스' <퀴담>의 서울 공연 첫날은 그렇게 거센 봄비가 내렸다.

<퀴담(Quidam)>, 라틴어로 '이름 모를 행인'이란 뜻. 1996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18개국에서 800만명 이상이 관람한,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작품 가운데 가장 예술적이고 서정적인 공연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 캐나다에서 창립한 세계적인 서커스기업. 현재 세계 7곳에서 순회공연과 6곳에서 상설공연을 벌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5000만 명 이상이 그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베스트셀러 <블루오션 전략>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책의 첫 장에 소개돼 있기도 하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

29일 저녁,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남문을 들어서자 굵은 빗발 사이로 조명을 받고 있는 텐트촌이 보였다. 고깔 형태의 노란 텐트, 지붕은 파란 줄무늬가 방사형으로 둘려있다. 이번 공연을 위해 5000여평의 광장에 세운 '움직이는 마을'. 6개의 텐트와 11개의 컨테이너로 이뤄진 '마을'은 자체 발전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마을 입구에 다가가자 이번 공연을 협찬하는 한 자동차회사의 대형 홍보간판이 먼저 눈에 띄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

그리고 그 밑에는 '태양의 서커스를 관람하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가장 놀라운 경험'을 위해 지름 50.5m, 높이 23.9m의 '빅탑'이라 불리는 공연텐트로 들어섰다. 2500여석의 객석이 3면에서 무대를 감싸고 있다. 무대 중앙 앞좌석은 '타피루즈'(VIP석, 264석), '붉은 카펫'이란 말뜻처럼 의자에 붉은 천을 씌워놓았다. 천정에는 푸른 대양(블루오션)이 아니라 구름과 함께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8시에서 5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조명이 꺼지고 "웰컴 투 서크 듀 솔레이, 퀴담"이란 소리가 빅탑 안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의 울림이 가볍게 가슴을 뛰게 했다.

조명이 다시 들어왔을 때 무대 위에선 의자에 앉은 채 신문과 라디오에 정신을 빼앗긴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앞에서 한 소녀('조이')가 무심히 놀고 있다. 무대 한쪽에 놓인 새장 속의 빨간 풍선이 소녀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독일식 바퀴'
'독일식 바퀴'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머리 없는 퀴담이 등장해 푸른 모자를 떨어뜨리고 나간다. 소녀, 그 푸른 모자를 쓰는 순간, 아빠 엄마의 의자는 공중으로 들려지고, 새장의 풍선은 날아가고, 관객들도 들뜬 마음으로 <퀴담>의 환상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한다.

<퀴담>에선 10가지 서커스 연행이 펼쳐지는데, 각 공연은 독립적이면서도, 주요 인물의 등ㆍ퇴장과 노래 및 마임 등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있다. 그리고 때때로 선보이는 광대의 익살이 적절히 객석의 긴장을 풀어주며 그 이음새 역할을 한다.

환상 여행은 '독일식 바퀴(German Wheel)'의 굴림으로부터 출발한다. 한 남자가 자신의 온몸으로 철제 바퀴를 굴리며 나타난다. 어딘지 다빈치의 인체비례도를 닮았다. 아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럴까. 경쾌하게 돌다가 때론 뒤뚱거리고, 거꾸로 매달린 채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바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어 경쾌한 음악과 함께 고깔 쓴 네 중국인 소녀가 등장해 '공중팽이(Diabolos)'를 돌린다.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요요를 닮았다. 막대에 매단 줄을 통해 돌리고, 튕기고, 주고받는 팽이 따라 어린 시절의 추억도 맴돌기 시작한다. 갑자기 한 소녀가 팽이를 공중에 튕기고 몸을 몇 바퀴를 구른 뒤 팽이를 다시 받자 객석에서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공중팽이'
'공중팽이'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곡예가 왜 '曲藝'인지 깨닫다

다음으로 천정으로부터 두 가닥의 붉은 실크천이 드리워진다. 그 안에 신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의상을 입은 한 여인이 감싸져 있다. '실크천을 이용한 공중곡예(Aerial Contortion in Silk)'.

여인의 몸과 얽혀 있는 붉은 천은 접히면 탯줄 같고, 펼치면 자궁 같다. 강렬한 느낌의 붉은 천과 아름다운 여체가 빚어내는 공중 곡예는 위태롭고, 그래서 더욱 우아하다. 새삼 곡예(曲藝)의 '예'(藝)가 뜻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줄넘기(Skipping Ropes)'. 두 명의 동양 남녀를 비롯해 20여명의 곡예사들이 등장해 현란한 줄넘기 솜씨를 뽐낸다. 줄넘기를 하면서 재주넘기를 하고, 줄 안에서 또 다른 줄을 넘는다. 조명에 비쳐 엇갈려 돌아가는 줄의 궤적이 그려내는 잔상들이 마치 그림 같다.

1부의 마지막 순서인 '공중후프(Aerial Hoops)'는 조이의 노랫소리와 어울려 돌아간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씌어진 노랫말, 후프에 의지해 하늘을 나는 세 명의 여자 곡예사들도 지상의 존재가 아닌 듯했다.

30분간의 휴식시간, 공연장 텐트를 나왔다. 빅탑 위쪽 둘레에 여러 나라 국기가 꽂혀 있다. 이번 공연에는 '태양의 서커스'의 다국적 예술가 56명이 참여했다.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라지만, 팸플릿을 뒤져보니 <퀴담>의 연주자를 제외하고 주요 출연진 가운데 캐나다인은 1명뿐이다. 러시아인, 일본인, 호주인, 브라질인, 중국인, 프랑스인, 브라질인 등 정말 다국적 예술가집단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싫은 관객들의 기립박수

환상 여행이 다시 이어졌다. 한 여성이 요염한 춤을 추며 등장한다. '손으로 균형잡기(Hand Balancing)'. 한 손으로 받침대를 잡고 물구나무를 선다. 그리고 무대도 돌고, 받침대도 돌고, 연기자도 돈다. 새로운 동작이 이어질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은 떨림. 그 떨림이 객석의 전율로 옮겨졌다.

'스페인식 거미줄(Spanish Web)'은 그 이름처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인간거미들이 굵은 밧줄로 허공에 인공거미줄을 펼쳐놓는다. 마치 영원히 땅에 내려오기 싫은 듯이 공중에서 밧줄을 갖고 놀던 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객석으로 자유낙하! 옆자리의 여성 관객이 짧은 비명을 손으로 막았다.

'균형잡기'
'균형잡기' ⓒ 오마이뉴스 권우성
웅장한 코러스와 함께 <스폰지>의 실험맨 차림의 무리들이 무대로 나온다. 무리 가운데서 한 쌍의 남녀가 태어난다. 그리스의 '조각상(Statue-vis versa)'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한 남녀가 서로 몸을 밀착한 채 조금씩 움직인다. 음악은 심장의 고동소리로 바뀌었다. 십자, T자, 남녀가 서로를 의지하며 허공에 몸을 띄워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형상을 빚어낸다.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서커스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공중그네와 달리 '구름그네(Cloud Swing)'는 나무판이 없는 줄만으로 이뤄졌다. 아찔아찔한 동작이 계속 이어진다.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일까. 유일하게 여성 곡예사의 몸에 안전줄이 매여있다. 천정에 그려진 구름이 보였다. 그녀는 그네를 타는 것일까, 구름을 타는 것일까.

환상 여행의 종착지에 <퀴담>이 마련해놓은 것은 '방퀸(Banquine)'이었다. 중세시대부터 이어져온 이탈리아 곡예술을 발전시킨 작품. 15명의 예술가들이 다양한 모습의 인간 피라미드를 쌓아 보인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도약대로 해서 비상하는 몸은, 그 순간만은 중력을 뛰어넘은 듯했다. 객석에서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피날레. 여행을 끝낸 소녀 조이를 아빠와 엄마가 품에 안는다. 퀴담이 다시 등장하고 소녀는 그에게 파란 모자를 돌려준다. 관객 역시 원치 않아도 여행을 끝내고 꿈에서 깨어나야 할 순간이다. 모든 출연진들이 나와 관객에게 인사한다. 관객들의 기립박수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불가능이란 단어일 뿐이다'

10시 35분, 중간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퀴담>과 함께한 2시간의 환상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중력과 관성의 법칙을 배반하는 곡예들과 세트, 조명, 의상, 음악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낸 한편의 '리얼' 판타지. 그것은 서커스라기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총체예술'이었다.

'조각상'
'조각상' ⓒ 오마이뉴스 권우성
<퀴담>은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피조물인지를 깨닫게 한다. 또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 앞에서 '불가능'이란 단어가 얼마나 초라한지도 깨닫게 한다. <타임>은 <퀴담>에 대해 "불가능의 실현"이라고 평했다. '태양의 서커스'가 직접 제작한 홍보영상 역시 '불가능이란 단어일 뿐이다(Impossible is only a word)'란 문구로 끝난다.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이란 홍보문구는 아마 과장일지도 모른다. 특히 화려한 동물쇼와 마술쇼나 기상천외한 기예와 곡예를 기대한 관객으로선 실망할 수도 있다. <퀴담>의 매력과 감동은 '기(技)'와 '곡(曲)'보다는 '예(藝)'에 더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세 이상 관람가'지만, 어린아이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퀴담>이 그 누구에게나 '놀라운 경험'이 될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퀴담>은 6월 3일까지 78회를 공연한다. 마리오 다미코 '태양의 서커스'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18만명 가량의 관객이 관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피루즈 20만원, R석 11만원, S석 7만7000원, A석 5만5000원. 전 가족이 함께 '놀라운 경험'을 하기엔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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