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가 표결을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그러나 2004년도에 그것은 국민주권에 대한 탄핵으로 여겨졌다. 대통령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그러나 한미FTA를 고시 약 1년여 만에 해치운 것에서는 그 어떤 국민주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통수권자의 '고독한 결단'만이 제단 위에서 군림할 뿐이다.
그동안 청와대는 한미FTA에 찬성하는 쪽하고만 대화했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국민은, 결과적으로 협상력만 높여주고 정부의 태도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길게는 수십년, 짧게는 수년에 걸친 사학개혁 과정에서 행사된 사학재단들의 영향력만큼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의 목소리를 선택적으로 들었다.
한미FTA 추진 말기로 갈수록, 과거 독재시기에 익숙했던 일들이 부활했다. 원천봉쇄, 기자폭행, 기자회견장 난입, 언로통제. 그에 따라 분신자살까지 재현됐다.
한미FTA의 주권 탄핵적 성격은 이런 절차적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절차적 정당성 여부는 오히려 부차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의 가장 큰 본질은, 한미FTA가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앗아가 투자자에게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암·기형아 발생시킨 회사에 1560만불 배상한 멕시코
정부는 투자자-국가소송제도를 옹호하며 반대 주장들을 일축하고 있다.
최근 논쟁이 붙은 것은 투자자-국가소송제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메탈클래드 사건'. 미국 메탈클래드사가 "'환경규제'로 영업을 방해했다"며 멕시코 정부를 국제분쟁조정 기구에 제소해 1560만달러를 배상받은 일이다. 한미FTA 반대론자들은 이를 투자자에 의해 공공정책이 공격당한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나 국정브리핑은 최근 이 사례를 해명하면서 한미FTA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반미 포퓰리즘'이라고 몰아붙였는데, 그 논리는 이렇다.
멕시코 정부가 낸 배상금은 단지 투자자의 '합리적인 기대수익의 침해에 대한 보상'이라는 주장이다. 이미 멕시코 정부가 폐기물 매립 사업을 승인한 상태에서 예기치 않게 지방정부가 사업을 막았으므로, 보상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체약국은 '공공 목적을 위한 경우' '비차별적인 경우' 등을 제외하고 자국 영토 내에 있는 다른 체약국 투자자의 투자를 수용 또는 국유화할 수 없다'라는 나프타 조항을 인용하고 있다.
이 조항을 인용한 이유는 투자자-국가소송제가 공공 정책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만 현실에선 멕시코 정부가 메탈클래드사에게 졌다. '투자자의 합리적 기대 수익'이 '환경'이라는 공공 목적에 우선한 것이다.
국정브리핑은, 명시된 합의사항조차 투자자유화 협정의 근본 정신 앞에선 무력해진다는 예를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공공정책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한국 정부는 허가받고 영업하던 사행성 게임장 영업을 금지시키며, 업주들의 기대수익을 보상했어야 한다. 적법하게 영업하던 유사성행위 업소들을 어느 날 갑자기 단속하면서도 그들의 피해를 보상했어야 한다.
미국 옹호하는 국정브리핑의 논리
메탈클래드 폐기물 매립장 인근 마을에선 오염으로 사람생명이 위험에 처했다. 암환자가 발생하고 기형아들이 태어났다. 사업주가 사전에 이럴 줄 몰랐어도 처벌 받을 일이고, 이럴 줄 알고도 영업했다면 가중 처벌을 받을 범죄다. 영업중지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다. 한번 허가를 내줘서 투자자에게 기대를 품게 하면, 땅이 썩고 국민이 죽어가도 정부는 속수무책이어야 한단 말인가?
멕시코 정부가 사전에 모르고 허가를 내줬다 해도 국민의 심판을 받을 일이고, 어떤 일이 생길지 알면서 허가를 내줬다면 더욱 엄중한 국민으로부터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국민으로부터의 처벌이 아닌 국민의 세금을 모아 메탈클래드 사에게 배상하는 일이 생겼다.
이 경우 보상받을 사람은 피해자들이다. 미국 내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징벌적 보상까지 해서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멕시코에선 피해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배상할 세금까지 부담한 셈이다.
공공정책 침해뿐만이 아니라, 극심한 불공정 상황이다. 다른 나라 기업이 미국에서 이렇게까지 환경을 오염시키고 오히려 배상까지 받아내는 사태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정브리핑은 아래와 같은 주장으로 이 상상하기 힘든 사태를 옹호하고 있다
"사건 전말을 보면 재판부의 중재판결이 미 기업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불공정하게 이뤄졌다고 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주장은 국민보다 투자자의 이익을 더 우선 순위에 놓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주권 탄핵이 아닐 수 없다.
청와대가 넘긴 공, 국민이 받아칠 때다
투자자의 자율권 신장은 사적 재산권의 절대화를 의미한다. 공화국의 시민은 주권자로서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사적 재산권의 영역에선 평등이란 없다. 그곳은 극단적인 빈부격차의 영역이다. 사적 재산권의 절대화와 주권이라는 절대적 평등성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는 한편으론 사적 재산권을 보호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사적 재산권의 절대화를 끊임없이 경계하며 국민 주권의 원리를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공화국의 두 축인 시장 원리와 공공성 원리의 공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뒤엔 헌법이 있다.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한국의 법질서를 문제 삼았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국가가 주권 원리에 의거해 사적 재산권 영역에 개입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제119조, 제120조, 제122조 등) 이 개입은 공공정책일 수도 있고 산업정책일 수도 있다. 투자자유화는 일국 단위 공공정책, 산업정책과 상충된다. 일반적 법질서를 문제 삼는 차원이 아니라 공화국 헌법 원리까지 위협 앞에 놓이게 된다.
2004년엔 국회가, 2007년엔 청와대가 번갈아가며 국민주권을 탄핵하고 있다. 이번엔 국회가 비준거부로 막아낼 차례다. 국민이 뒤를 받쳐야 한다.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부활한 독재의 망령 중에 '말없는 다수론'이 있다. 과거 독재정권이 저항세력의 주장을 무시하며 동원했던 논리다. 그 논리가 한미FTA 협상 중에 다시 나왔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 다시 국민이 '말없는 다수론'을 전복시켜야 한다. 공이 넘어왔다. 청와대가 넘긴 공을 받아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