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출장을 갔다가 '숫자 착시'에 빠져 낚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비싼 일본이니 조심해야지 하다가도 우리 돈 보다 '0'이 하나 없는 일본 가격에 순간 싸다는 착각을 일으켜 덜컥 지갑을 열었다가 출장비가 모자라 낭패를 보곤 했다. 한 번만 당했으면 모르겠는데 번번이 당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 숫자 지능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수학을 어렵게 배우는 수학 강국이다. 명색이 이과를 나온 나는 지금도 미적분 정도는 어렵지 않게 풀곤 한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숫자를 만난다 싶으면 이게 영 그렇다. 저축이나 보험 상품을 고를 때 몇 %, 몇 개월 하는 숫자 앞에 판단력이 마비된다. 아내와 마트에 장보러 가서도 묶음이 유리한지 낱개가 유리한지는 둘째 치고 지금까지 얼마 정도 장을 봤는지도 쉽게 헤아리지 못한다.
경제가 (좀 더 솔직하게는 돈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서 숫자에 약하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은행 상품을 두고 유리한 이율 선택하는 과목도 있다고 하고,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이들 앞으로 펀드 상품을 들어주어 투자에 대한 감각을 키워준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IMF 때나 이번 한미FTA에서 미국에 휘둘리는 대한민국이란 어쩌면 잔돈을 쉽게 생각하고, 약관이나 이자 꼼꼼히 따지지 않는 우리들의 숫자 지능에서부터 이미 승패가 갈렸는지도 모르겠다.
<숫자로 들춰본 세상>은 숫자와 데이터와 통계를 메스 삼아 대한민국을 해부대 위에 올려놓았다. '직장인들이 월급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나 '섣불리 창업하면 안 되는 이유' 같은 실용적인 물음들은 물론 'IMF 이후 외국은 사라진 돈'이나 '외국 투기자본이 한국에서 쉽게 돈 버는 이유' 같은 열 받는 물음을 지나 '행복한 삶 못지않게 자연사가 중요한 이유' 같은 철학적 물음까지 모두 숫자들을 통해 명쾌하게 답하고 있다.
과거처럼 연수만 채우면 알아서 월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적을 증명하고 스스로 연봉 인상률을 쟁취해야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숫자 지능을 높이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필수 과목일 것이다.
흔히 경제 지능을 높이는 좋은 방법으로 경제 신문을 꾸준히 구독하면서 안목을 높이라는 충고를 듣곤 하는데 <숫자로 들춰본 세상>은 수년 치 경제신문을 압축한 뒤 친절한 강의까지 더해진 셈이라 이 부분이 약한 분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숫자로 들춰본 세상>은 이중성이 있다. 일단 경제 교양서나 통합 논술 교재로 활용 가능한 실용서 또는 글을 쓸 때 참고 자료 역할을 하는 실용서로 제 몫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구체적인 숫자로 대한민국을 해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부를 통해 드러난 대한민국의 환부를 고칠 수 있는 저자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사회 시스템이나 국가 경영은 숫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 대선 때도 그랬고 최근에도 대선 주자들 사이에는 성장률 몇 %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는데 우리 생각에는 성장률 1∼2% 차이가 별거냐 싶겠지만 국가 차원에서 성장률 1%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국민연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적정 환율은 어느 정도인가, 후보 지지도에 거품은 없나 등 사회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 하는 문제는 구체적인 숫자들을 통해 죽고 산다.
저자는 숫자에 약해 손해 보는 민생 경제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정부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이뤄지는 낭비를 안타까워한다. 그런 저자가 내 놓는 대안 중에는 돈 있는 사회가 가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돈 없는 사회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실물 화폐를 없애 나가고 전자 결제를 활성화시켜 투명한 경제를 구현하자는 주장이다. 저자는 돈 없는 사회를 기반으로 한 5대 개혁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기자의 소감이라면 혁신적인 것과 과감한 것 사이에 있지 않나 싶다.
굳이 개혁을 지향하지 않더라도 기술 발전의 흐름을 따라 실물 화폐의 비중이 줄어들고 전자 결제가 늘어날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저자가 주장하는 투명성으로 이어질지는 몇 가지 검토가 필요하다.
종이 화폐는 위조나 변조가 가능한 반면 전자 결제는 그런 위험이 없다고 하지만 전자 화폐는 악의적 해킹이나 기술적 미비로 인한 오작동의 위험이 존재한다. 전자 결제로 뇌물이나 지하 경제를 차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뇌물의 경우 금이나 다른 실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전자 결제로 투명성을 얻는 것이 빛이라면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것은 그늘이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사는지가 고스란히 DB로 구축될 경우 이것이 남용되거나 악용될 가능성은 발생하고 개혁을 위한 장치가 거꾸로 주권을 위협하는 상황도 가능하다.
또 지금까지 신용카드 사용이 신용대란을 불러온 거처럼 실물 화폐에 비해 전자 결제는 돈에 대한 감이 떨어져 낭비를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고 이런 경우 부유층보다는 서민층이 쉽게 함정에 빠지곤 했다는 문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화폐 단위가 생긴 고액권 논의에 대해 다른 문제보다 부정부패를 부채질할 것이라는 논란이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 된 것이나,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는 것처럼 민생을 안정시키고 더욱더 이상적인 사회 시스템을 위해서는 돈의 흐름에 어떤 식으로건 방책을 마련한 필요성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돈 없는 사회' 역시 이런 흐름에서 구체화해 나가면 좋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기도 한 저자에게 현장에 나와 부대끼며 담론을 구체화할 것을 권한다. 정보통신 관련 기반이 튼튼한 대한민국에서는 도토리를 비롯한 사이버 머니가 활성화되어 있고, 대중 교통수단은 전자 지불을 기본으로 시행되고 있다.
최근 국방부에서 전 장병에게 지급하기 시작한 '나라사랑' 카드의 경우도 '돈 없는 사회'를 맛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고, 전자주민등록증 반대를 하는 진영과도 만나 사생활 보호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들어야 할 것이다.
<숫자로 들춰본 세상>은 흥미로운 시도였다. 저자가 바라는 돈 없는 사회가 실현 가능한지, 부작용을 줄이고 최대한 본뜻을 살리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이어지는 저자의 발걸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