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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지위가 과거보다 향상되고 있다는 걸 가장 실감하게 되는 것은 비하되었던 과거의 여성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다.

여성을 온전한 인간의 지위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이 역사에 의해 왜곡된 과거 여성들의 모습을 바로잡고 있고, 이러한 움직임은 미래 여성의 지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여실히 실감하게 해주고 있다.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사건>이 나온 이후로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커져갔지만 그의 처였던 강빈에 대해 다루는 이는 없었다.

지난 해 김별아가 <영영이별 영이별>을 통해 단종비의 삶을 복원해 내었을 때, 이제 누군가가 강빈의 삶을 복원해낼 차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린 후 올해 초가 되어서야 <강빈>이 세상에 나왔다. <물의 말>의 작가 박정애가 소현세자빈의 삶을 소설로 형상화해 낸 것이다.

"강빈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 강빈과 최초에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전근대 여성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다. 원래는 굉장히 서민적인 캐릭터인 '덴동어미'를 써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출판사(예당)에서 연락이 왔다. 강빈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강빈이라는 인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원래 빠져들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스타일인데 강빈에게는 금방 빠져들었다. 강빈이라는 인물로 인해 가슴이 뜨거워졌고, 꿈속에서 강빈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 강빈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가 많이 있었나.
"거의 없었다. 남성에 의한 역사였으므로 여성 인물에 관해서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했던 것이 사실이다."

- 주로 어디서 자료수집을 했는가.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했고, 심양장계를 많이 참조했다. 우리 선조들은 기록정신이 굉장히 뛰어났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심양에 있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거의 매일같이 임금에게 써서 보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상사가 세세하게 적혀 있다. 심지어 세자빈이 담이 있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런 일상사를 참조해서 막막했던 부분을 많이 해결했다. 고전문학가들이 남긴 문집도 참고 했다.

- 소현세자도 아니고 소현세자빈 이야기라니. 굉장히 쓰기 어려웠을 것 같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인데다가 왕비도 아닌 세자빈의 이야기가 얼마나 남아 있었겠는가.
"어려웠다. 자료가 정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 부족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이 생겼던 것 같다. 혜경궁 홍씨처럼 스스로 쓴 자서전이 남아 있는 여성의 경우라면 오히려 소설화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서전 자체가 워낙 잘 써진 일대기라서 누군가 소설화하겠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 혜경궁을 소설화한다면 어떻게 그리겠는가.
"혜경궁은 뛰어난 문인이자 노련한 정치가였다. 뛰어난 필력으로 자신의 일생을 그렸고,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시킬 줄 알았던 몇 안되는 조선 여성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렸을 것 같다."

-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여성을 그린다면 어떤 여성을 택하겠는가.
"권력을 가지지 못했던 서민층의 여성을 그리겠다. 사실 강빈은 내가 그린 최초의 권력 여성이었다. 억울하게 죽었지만 어쨌든 왕실의 여인이 아니었는가.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이제까지 자주 그려져왔던 여성들은 대부분 힘이 있는 여성들이었다. 황진이도 계급상으로는 기생이었지만 권력이 있는 양반층을 주로 상대했고,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무기(예술)를 지녔었다.

장희빈이나 신사임당 등도 마찬가지로 권력층에 속한 여성들이었다. 왕실여성이 아니고, 자기표현능력도 없는 서민층의 여성의 삶을 형상화하고 싶다. 후속작인 <덴동어미화전가>의 덴동어미가 그런 인물이다. 소설가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살다가 어느 날 죽으면 없어져버리는 것이 되고 마는 약자의 삶을 글로 형상화시켜 길이 남기는 것."

"다음엔 서민층 여성의 삶을 쓰고 싶다"

- 강빈은 여성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가.
"이제까지 그려져왔던 역사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의 사랑에 목매닮으로써만 성공하는 여인들이었다. 장희빈, 장녹수 등이 대표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그런 여성이 아닌 긍정적인 캐릭터, 자신의 능력으로 남들을 지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여성 정치 지도자상, 그것이 강빈이 가지는 의미이다."

- <강빈>을 출간한 후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이 책을 내고 난 후 50이 넘으신 남자분이 춘천까지 찾아오셨다. 내 소설에는 강빈의 딸이 손수 쓴 행장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 남자분은 그 행장이 실제 있는 문헌이라고 거의 확신을 하시고 계셨다. 실은 백퍼센트 내 창작이다.

그 분이 내 소설을 극찬하시면서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이다. 그 행장도 실제 있는 행장임에 틀림없다. 어서 내놓아라. 우리 박씨 가문의 가보로 대대로 물리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굉장히 뿌듯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그것도 젊은 20대 남성부터 50대 남성까지 내 독자층이 굉장히 다양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 나도 읽으면서 행장 부분이 실제 존재하는 문헌을 인용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창작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굉장히 잘 만든 고전편지다.
"(웃음) 고맙다."

- 읽으면서 가장 통쾌했던 부분은 병자호란의 치욕때 자결을 강요하는 신정언에게 강빈이 분노를 느끼는 장면이었다. "미친놈. 너의 인이 그런 것이거든 너나 실컷 너의 인을 이루어라.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여 애쓰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본성 중에 으뜸가는 본성이매, 나에게는 그것이 인이다. 나는 죽을 힘으로 나의 인을 힘써 추구할 터이니 나에게 너의 인을 강요하지 말라. 대저 치욕을 못 이겨 죽고자 하면 자신이 먼저 죽을 일이요 남에게 강요할 바가 아니거늘 더구나 신하의 도리로 어찌 이러할 수 있단 말인가. 강화로 피난 온 사족 부텨 중에 목을 매거나 은장도로 심장을 찌르거나 바닷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되, 개중에는 스스로 죽고자 하여 목을 맨 이도 더러 있을 것이나, 시부나 지아비, 아들의 강요로 마지못해 자결한 이가 더욱 많았다. 나라의 빈궁조차 신하에게 자진을 강요당하는 형편임에랴." 어떻게 이런 심리묘사가 가능했나.

"(웃음)이 장면은 사실 신씨가문의 야사로 남은 것을 강빈의 입장에서 풀어 쓴 것이다. 원래는 신정언이 얼마나 절의와 충성심이 강했었는지를 강조하는 일화였다. 자료가 없으니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장면 장면을 엮어나가야 했다."

- '문단의 여성화'를 염려하는 평론가들의 시각이 있다. 김승옥을 논할 때는 감수성의 혁명 운운하는 평론가가 은희경이나 공지영을 논할 때는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 천착하는", "사회의식이 결여된"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쏟아낸다. 문학진영 내부에도 여성비하적인 사고가 상당하다고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분명히 있다. 작가의 성을 알고 나면 남성 평론가들의 평이 백팔십도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게 있다.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이야기하면, 예전에 박영숙이라는 소설가가 전쟁에 관한 소설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소설에 대해 한 남성 평론가가 이런 평을 냈다. '여성작가의 세심함으로 전쟁에 관해서 꽤 세세하게 묘사했으나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큰 스케일의 주제를 다루기에는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어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이 평이 나온지 며칠 후에 작가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 박영숙이라는 소설가는 남성이었던 것이다. 이 일화만 보아도 문단내에 여성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가지 않나."

"단편보다 장편이 좋다"

- 화제를 전혀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썼던 소설들을 보면 단편보다 장편이 훨씬 좋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나는 문창과에서 정통 코스를 밟아서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단편미학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치는데 그걸 단편이라는 그릇에 잘 못 담아내는 것 같다."

- 글쓰는 것 외에은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인가.
"음악을 듣는다."

- 어떤 음악을 듣는가.
"라틴 음악. 남미쪽 음악을 듣는다. 이상하게 남미쪽 무언가에 끌리는 편이다. 작가도 남미쪽 작가들을 좋아한다. 이사벨 아옌데, 바르가스, 마르케스를 읽으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결국 내면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기 마련일까. 작가에게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이쯤에서 인터뷰를 접었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그녀에게 이미 다른 스케쥴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작가에게 사적으로 몇 마디를 얼른 건넨뒤 서둘러 보내주었다. 겸손하지만 힘있게 말하는 그녀가 대화하는 도중 한번도 막히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엄청난 달변이었다는 것을 작가와 헤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강한 아우라를, 만난 후에야 느끼게 하는 사람이구나.

돌아오는 길,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내 안에서 순환하기 시작했다. 혜경궁 홍씨, 장희빈, 인목대비, 강빈, 강빈의 딸, 박정애…. 이들의 삶이 내 안에 반영되어 무언가로 맺힌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강빈

박정애 지음, 21세기북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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