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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복 목사.
박승복 목사.

대담 : 윤진호(전대협동우회장), 강윤중(전대협동우회 사무국장)
정리 : 안진걸(KYC 실행위원)


최근 강원도 태백까지 내려가서 그를 만났습니다. 까만 얼굴에 장대한 기골의 그는 태백의 한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목사라기보다는 '청년' '농부'에 가까운 첫 인상이었습니다. 지역운동에 종사하는 일꾼 같기도 했고요. 아내와 아이들은 교회 옆 사택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를 다니면서, 조용한 종단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에 '세게' 뛰어든 '청년학도'였습니다. 그의 치열했던 대학시절은 "언제든지 '적'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칼을 가지고 다녔다"는 그의 회상대로 '전투적인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학생운동으로 20대의 대부분을 보내고 직장생활까지 열심히 해봤지만, '신학도'의 피는 그를 다시 목회 현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됐습니다.

칼 갈던 청년학도, 십자가 든 목사로

그러나 목사가 돼서도 학생운동의 정신은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청년시절 분단으로 고통 받는 민족, 삶이 아프기 만한 민중들에 대한 애정으로 학생운동을 했듯이 목사로서 하느님과 함께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사상에 열려 있는 '열린 목사'가 되고 싶다"며 "지금도 신앙인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사와 인문학에 대한 온갖 공부를 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통 분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목사가 되어서도 검소한 생활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향도 아닌 전라도에 이어 '산골짜기' 강원도 태백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제는 '신의 계시'와 사명감으로 2007년 안에 아메리카 원주민 자치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려 20여년을 그렇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후에는 "태어난 곳은 남쪽이지만, 죽는 곳은 북쪽이 될 것이다"며 이북 동포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학생운동, 전대협의 정신은 계속 되고 있다, 그 정신으로 진정한 인간 구원과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박승복 목사의 모습에서 80년대 학생운동의 발전적 진화 또는 학생운동의 신앙적 버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 "전대협 세대들이 곳곳에서 변함없이 좋은 삶을 기획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끝없는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꿈꾸고 있다, 종교인으로서 감히 사회적 혁명가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다짐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다음은 박승복 목사와의 대담 전문입니다.

인천서 학생운동, 태백서 목회, 아메리카서 은퇴... 끝은 북쪽서

성화교회.
성화교회.
- 원래 고향이 태백이세요?
"인천이 고향입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 마포지만, 인천에서 쭉 살았어요. 지금도 어머님과 형님이 인천에 살고 계시고요. 84학번인데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다녔고 95년도에 졸업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가 99년도에 대학원을 갔어요. 그래서 2001년도에 대학원 졸업하고 전남 순천에서 담임 전도사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다가 2004년도 7월에 태백으로 온 것이지요.

낙후지역, 특수지역 목회활동에 관심이 많아요. 이북이라든지 아메리카 원주민 자치지역이라든지. 실제로 올해 안에 아메리카 원주민 자치구역에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감리교 소속으로 가는 것이라서 감리교단 안에서 파송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뼈를 묻는 각오로 가야 합니다. 이번에 가게 되면 20년 혹은 거기서 생을 마감하고, 만약 은퇴까지 살아있다면 남은 생은 이북의 동포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식구들도 다 같이 갈 생각입니다."

- 어떻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갈 생각을 하셨어요?
"목회활동을 하다가 언제인지 '계시'나 '영감'처럼 그 생각이 떠올랐어요. 또 전 태어난 곳은 이남이지만, 아마도 죽을 때에는 이북에서 죽지 않을까 싶어요. 단순히 신앙을 전도하는 역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가장 고통받았던 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지요. 저로서도 엄청난 모험이고, 결단이지만 꼭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이번 아메리카 원주민과 함께하는 선교 프로그램에 동의하고, 제안하고, 교단에 허락도 받고, 또 펀딩도 하고…. 그렇게 준비를 하게 된 것이지요."

- 철학과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데, 학생운동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저는 서울 서부지구에 있는 감리교신학대를 나왔는데, 한 번도 학교 안에서 운동을 해본 적은 없어요. 이른바 인천지역 '자생적 학생운동 조직(언더 서클)'에서 운동을 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직도 인천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접고, 그때 같이 활동하던 친구 혹은 후배 선배들이 민주노동당에도 가있고 재야단체에도 가있고 그렇더라고요. 3년 전에 돌아가신 범민련의 강희철 선배님도 그때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였습니다."

- 더 거슬러 올라가 특별하게 사회운동에 눈 뜬 계기가 있다면요?
"고등학교 때 학력고사를 마치고 서점에 가서 잉게 숄이 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을 너무 좋아했고 감동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때 인천 지역에서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서 그 책 이야기를 '건방지게' 했어요. 그랬더니 공부를 한번 본격적으로 하자고 해요. 그래서 84년 3월 달부터 인천 이곳저곳에서 '세미나'라는 것을 시작했어요. 그것이 운동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됐죠.

또 돌이켜 보면, 중·고등학교를 벗어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억압하고 압제하는 것에 저항하려는 꿈틀거림 혹은 불만이 운동과 연결된 계기였습니다. 고3 여름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때도 학교가 너무 답답해서 '초상났다' 거짓말을 치고 교회 수련회를 따라가기도 했어요. 이 자리를 빌어 속아주신 고3년 담임선생님께 죄송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게 죽자, 그것이 혁명이다"

- 목사님의 운동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겠지만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예수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것이 운동의 동력이 되었죠. 그런데, 기독교라는 것이 교조와 지배자들의 종교가 되면서 예수가 갑자기 절대자가 되어 버렸어요. 예수는 절대자로 살려고 하지 않았고, 절대자가 되지 않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절대자로 만들어버린 거에요.

마더 테라사도, 간디도 절대자로 살지 않았어요. 끝없이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죠. 저도 그렇게 끝없이 종교개혁을, 사회개혁을 꿈꾸며 살고 싶어요. 종교인으로서 감히 사회적 혁명가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 전통적인 사회혁명과는 다른 혁명을 꿈꾸시는 것 같은데요.
"저의 혁명은 '무장 혁명' '힘의 혁명'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혁명이에요. 서로 아름답게 바뀌는 그런 혁명. 학생운동을 마치고 그 이후 쭉 그렇게 세상을 살면서 낸 결론이에요. 그러지 않고서는 보다 근본적인 혁명이란 존재할 수 없어요. 보다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해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혁명(革命)'이라는 것은 가죽(革)이 벗겨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완전히 힘이 빠져야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진정한 변혁입니다. 예수도, 장자도 다 그렇게 했어요."

- 학생운동 때와는 달라진 것이네요. 매우 전투적이셨을 것 같은데.
"그때는 정말 전투적이었죠. 진짜로 칼을 품고 다녔어요. 여차하면 '파쇼도당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87년도에 제게 할당된 사업이 투쟁부서였습니다. 아마도 그 때쯤부터 실검을 가지고 다녔어요. 전경이든 사법경찰이든, 검거와 폭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죠. 잡히면 사람들(동지들)을 불 수 도 있으니까, 절대로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지배받고 있었지요. 발검연습까지 많이 했어요. 한방에 목줄을 딸 수 있는 딱 한수의 발검 연습을 한 것이죠. 나무를 연습상대로 해서. 그 때 같이 만난 친구들도 무서웠다고 나중에 만나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운동·해방·구원·깨달음·인문·사랑·화해·용서에 대한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더 심화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87년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87년은 정말 열심히 싸웠던 때이죠. 정말 혁명의 시기였습니다. 청년의 혈기가 거리로 뛰어가게 했지요. 86년에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름대로 여러 운동론에 대해 공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민혁명, 민중혁명, 민주혁명, 세계혁명 다 검토했지요. 그중에 민족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들을(NLPDR) 접하고, 운동에 더 열심히 뛰어들었죠.

아마도 이런 관심과 열정들이 87·88년에 인천지역에서 있었던 모든 집회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87년 6월 부평 중앙로에서 선동을 하며 가투를 벌일 때가 기억이 나요. 고등하교 동창들, 친구들, 교회 사람들 다 만났어요. 당시에는 정말 기운이 나는 하루였습니다. 시민들의 호응은 평생 잊지 못할 듯합니다."

"'쎄 빠지게' 잔업하던 시절, 공부를 다시 생각했다"

박승복씨와 대담 중인 윤진호 전대협 동우회장.
박승복씨와 대담 중인 윤진호 전대협 동우회장.
- 또 학생운동 시절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음, 85년에서 86년을 넘어가는 사이에 선배들의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론 공부는 안하고 오직 싸움만 하려하였지요. 당시엔 '무슨 공부냐? 지금 당장 무장투쟁을 통해서 혁명정권을 수립해야지. 빨리 체력단련하고. 총 쏘는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85년 겨울 공활(공장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직접 공장에 가서 '쎄 빠지게' 잔업 하는데 돌아버리겠더라고요. 하도 힘들어 일 끝나고 소주 한 잔과 닭발 한 점 했는데 3시간 오바이트하는 일이 있었어요. '대체 이게 무슨 고통스러운 현실이냐?' 그 때부터 공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데, 옆에 노동자와 할 얘기가 없는 거에요. '자본가와 독재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연장 들고 푹 찔러야지' 하는 말을 바로 할 수는 없고…. 사회 문제와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설명을 못하고 있더라고요. 술 같이 먹던 노동자들이 나이트 가고, 성적으로 방만해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고, 붙잡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깨졌죠.

그 일을 계기로 큰 성찰을 하게 됐어요. 만약 그런 경험과 자각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적군파'가 되었을 거에요. 원래 싸우는 것만 좋아했으니까요. 그때부터 여러 공부를 하게 됐고, 또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됐지요. 그래서 좀 변하게 됐던 기억이 나요. 어떻게 말하면, 당대 모든 이들이 고민한 모든 것을 안고 싸메고 지고 이고 다니다가 지금 목사가 돼있는 셈이죠."

- 전대협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87년도에 전대협 연락 실무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대선 패배 후 학교와 운동을 좀 쉬었죠. 그러다 88년도에 복학했고, 89년 봄에 전대협에서 아는 이한테 어떻게 연락이 와서 다시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축전준비위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으로 결합하게 됐지요. 전대협 간부들이 모두 제가 인하대 출신이라고 알았는데, 나중에 감리교신학대 출신이라는 것 알고 다 놀라더라고요. 당시에는 그렇게 살아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다가 학교에 다시 89년 2학기에 1학년으로 복학했고요."

- 'NLPDR'(민족해방운동론)에 충실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전 통일의 방안은 여전히 연방제의 방식 밖에 없다고 봐요. 그 외의 것이 있다면 더 공부를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게 있나요(웃음)? 물론, 혁명 노선은 많이 바뀌었는데, '자주·민주·통일'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죠. 그것은 적어도 정치노선으로서, 한반도 사회의 변화의 방향으로서는 옳다고 생각해요.

제 이메일 아이디가 'nvnpks'인데요, 앞의 'nvn'은 'Nirvana(열반·해탈의 산스크리트어)'고, 'pks'는 'peace korea struggle(평화 한국 투쟁)'의 약자인데, 그런 지향을 제 이메일에도 담아놓은 것이죠."

"직함은 없다, 치열하게 산다, 나는 운동한다"

- 정치노선과 사상은 다른데요, 사상은 어떻게 변화하셨는지요?
"전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이고, 신앙인이며 목사입니다. 영적인 부분의 이야기를 빼고, 현실 세계의 하나의 인간으로 제게 '당신 사상이 뭐냐'고 묻는다면, 전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이라고 대답할 것이에요. 이것을 교조화시키고, 일부만을 강조한다면. 이것만큼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사상이 없어요.

다만 힘을 쭉 빼고 민중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중심이라고 말하는 사상만큼 좋은 사상이 없어요. 그 사상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 그 사상의 핵심(사람 중심의 사상)은 끝없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노빈 교수라는 분이 쓴 ‘신생의 철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전 그분의 글을 보면서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분명한 것은 사상의 핵심을 이해해야지, 열정의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 개인적으로 볼 때 신앙과 신학, 사상의 연관성을 어디서 찾고 계십니까?
"신앙과 신학, 사상의 문제는 다 다른데요. 제 경우를 봐도 신앙은 언제나 있었어요. '하느님이 계시다. 그와 내가 함께 한다' 그것은 늘 버릴 수 없는 질긴 작은 끈이었어요. 신학은 신앙을 바르게 세우고, 엮는 것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과 사회 변혁의 사상이 충돌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목사로서 이 땅에서 제일 좋은 현실 개혁의 사상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요? 사람을 사랑하라고, 구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람이 주인이고 중심이라는 명제가 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신앙은 내세의 문제, 영적 구원의 문제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현실 세계의 사상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의 문제이면서, 넘어가는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지금도 목사로서 '운동'에 참여하고 있나요?
"현재는 목사로서, 준비하는 학인으로서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공부, 인문의 공부도 더 하고 있는 중이라 예전처럼은 활동은 못하고 있죠. 그렇지만 제 삶에 청년의 운동과 정신은 계속 되고 있어요. 그 정신으로 진정한 사람 구원과 해방을 위해 노력하려 해요. 운동은 곧 삶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운동이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무슨 직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대학#운동권#전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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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시민입니다. 현재 참여연대(www.peoplepower21.org) 실무자로 '민생희망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과 다양한 강좌 프로그램도 종종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희망의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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