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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하고 좋은 향이 나는 장미꽃 못지 않은 행복이 들꽃에게도 있다고 여긴다.
ⓒ 김은주

월말이라 농협에 공과금을 내러갔다. 은행 여직원들이 앉아있는 창구 맞은 편, 고객용 의자는 빈 자리가 한 자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앞으로 대기자가 많다는 뜻이고, 난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두리번거리며 여성잡지를 찾았다. 마침 당월 호가 보였다. 인쇄기를 막 빠져나온, 석유 냄새가 좀 남아있는 신선한 최신호였다.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앉자마자 읽어 내려갔다.

앞쪽으로는 주로 광고였다. 광고 면을 꽤 많이 넘겼다고 여길 때 쯤 목차가 나왔다. 관심 있는 제목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가만히 보니까 내 눈길을 주로 사로잡은 기사들은, '이경실, 재혼' '조영남의 근황' '80년대 톱스타 누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 연예인 사생활에 대한 기사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기사만 골라 읽다가 내 눈을 확 휘어잡는 기사를 발견했다. '제니퍼 전' 이라는 여자에 관한 기사였다. 그녀는 정말 대단했다. 우리네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화려함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함이다.

미국에서 재벌 몇 위 안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재계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소로스라는 사람의 몇 째 부인이 되면서 그녀의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지게 됐다. 소로스와 결혼했다하여 신데렐라로 신분이 급상승한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 딸이었고, 학교도 그 유명한 줄리아드 음대를 나와 지금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데, 미국에서도 상류층을 상대로 공연을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화려한 인생을 사는 여자였다.

'와, 대단하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녀에 관한 기사를 거의 다 읽어갈 무렵 내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과금 용지와 돈을 챙겨 은행 여직원 앞에 섰다. 그런데 여직원과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난 작은 충격에 빠졌다. 은행 여직원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 그녀가 그렇게 평범하고 한심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제니퍼 전의 기사를 읽으면서 본 제니퍼 전의 화려한 외모와 대단한 캐리어에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칙칙한 색의 유니폼과 밋밋한 외모의 은행 여직원이 그렇게 시시하게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이런 생각에 가끔씩 빠지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사람들 눈길이 잘 닿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서 '저 꽃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데 왜 피어있는 거지' 했고,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야산을 의지하고 있는 작고 초라한 집을 보면서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수학문제를 낑낑거리며 풀듯이 들꽃이 살아가는 이유, 여름 하천을 가득 매운 잡풀이 살아있는 이유나 어느 초라한 집에 사는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었다. 은행 여직원이 내 모습이고, 들꽃이 내 모습이니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과 마주치며 살아가면서 언제나 같은 답을 얻곤 했다.

'제니퍼 전에게는 돈이 아주 많은데, 그 돈만큼, 그 화려함 만큼 행복해진다면 그녀의 행복은 도대체 얼마큼인거야? 그래, 행복은 그런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제니퍼 전에 비해서 저 여자는 초라하니까 그럼 엄청 안 행복해야 하고, 제니퍼 전의 행복은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인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행복지수는 그런 것하고 상관없이 돌아가는 프로그램인 거야.'

결론은 화려한 삶이나 평범한 삶이나 행복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갖추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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