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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시인의 육필 원고.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원고이다.
ⓒ 살림

비가 왔다. 지난 10일 오후였으며 오랜만에 탑골공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탑골공원에서 낙원동으로 가는 길에서 비를 만났다. 후둑후둑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거리를 금세 적셨다. 작은 구멍가게 처마에서 내리는 비를 피했다.

아직 저녁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거리는 벌써 어둠을 준비했다. 상점들은 집 앞의 간판에 서둘러 전기를 넣었다. 환하게 밝혀진 네온빛이 비에 젖어 어른거렸다. 지나가는 차량들은 속도를 잔뜩 줄이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샀다. 갑자기 내리는 비로 쌀쌀한 기운이 돌았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담배연기를 입김 삼아 허공으로 뿜어냈다. 연기를 하늘로 날리며 눈에 익숙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맞은 편에 보이는 건물은 예전 '파고다극장'이었다. 지금 극장은 사라졌다. 파고다극장은 삼류 영화관이었다. 파고다극장은 오래전 봄날 새벽 한 시인이 숨을 거둔 곳이다. 18년 전의 일이고 당시 파고다극장은 심야영화를 상영했다.

독자의 경우 파고다극장엔 단 한 번 가보았을 뿐이었기에 그때 무슨 영화를 상영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동시상영관의 장점은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파고다극장은 두 편의 영화를 돌리며 갈 곳 없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삼류극장인 파고다극장에서 숨을 거둔 시인은 기형도이다. 1989년 3월 7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아홉, 요절이었다.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난다"

▲ 기형도 시인 생전 모습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 기형도 시 '그 날' 중에서

시인은 죽음을 맞기 전 이미 죽음에 관한 여러 장치를 자신의 작품에 남겨 놓았다. 그의 시가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이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시인의 시편들에서 죽음에 대한 장치를 발견하지도 후일 발생할 일을 예감하지도 못했다.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그 새벽 당시 객석엔 몇 명의 관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인의 가방엔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한 권과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밑줄 치며 읽었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전부였다.

시인이자 일간지 기자였던 그는 왜 삼류극장에서 숨을 거두었을까. 사인은 뇌졸중이지만 그가 파고다극장으로 걸음한 연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개봉관도 아닌 심야 동시 상영관인 삼류극장에서 그는 왜 생명의 끈을 놓았을까. 혹, 그의 시에서처럼 시인은 다가올 죽음을 맞으러 극장을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필이면 왜 파고다극장이었을까.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화장실 바깥까지 오줌 냄새가 새어나오던 파고다극장에서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죽음에 대해 이유와 분석은 분분하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불안한 생존... 훌쩍훌쩍 울던 어린 기형도

시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시인은 서해 연평도에서 태어나 5살 무렵 서해안 간척 사업에 실패한 부친을 따라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소하리는 철거민들과 수해 이재민들의 정착촌이었다.

토박이보다 이주민들이 많은 소하리의 생활은 안정적인 듯 싶었으나 그 세월은 짧기만 했다. 시인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때부터 시인의 모친이 가장 역할을 했다. 시인은 이 때의 기억을 시로 남겼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 기형도 시 '위험한 가계. 1969' 중에서


부친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시인의 가계는 불안을 넘어 위험할 정도로 곤두박질쳤다. 구멍이 숭숭 난 옷으로 겨울을 나야 하는 위험한 가계는 시인의 어린 시절을 더 힘들게 했다.

시인의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시장통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장터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다가 혼자 훌쩍훌쩍 울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전문


누이의 죽음, 시인에게 시를 부르다

▲ 기형도 시인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 문학과지성사
시인은 어릴 적 그림을 즐겨 그렸다. 어린 시인이 홀로 시간을 보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림뿐이었다. 그렇다고 돈을 필요로 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시인은 크레파스를 사지 않아도 되는 만화를 선택했다. 연필만 있으면 쓱쓱 그릴 수 있는 만화는 시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엔 더 없이 좋은 친구였다.

시인이 시를 쓰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여고 2학년이던 셋째 누이의 죽음이 그를 시인의 길을 걷게 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누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맛보았으며,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누이의 죽음 이후 시인이 중3 때 쓴 시를 보자.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지 않는다

- 기형도 시 '나리 나리 개나리' 중에서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 '안개'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안개는 어린 시절 시인을 타인으로부터 숨겨주는 친구이자 두려움이었다. 그가 살았던 소하리는 안양천이 흘렀고 천변으로 긴 방죽이 있었다. 사람들은 안개를 따라 집을 떠났고 안개와 함께 돌아왔다. 그가 세상에 내어 놓은 첫 시의 제목도 '안개'였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기형도 시 '안개' 중에서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개'를 읽으면 시인의 삶이,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가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시인은 시에서 오히려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이 낯설 정도라고 했다.

안양천변에 살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안개의 주식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긴 방죽 위를 걸어가는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웠으며, 마을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근처의 공장으로 갔다. 여공이 된 아이들은 언니들이 그러했듯 안개 낀 방죽을 걸었다.

검은 페이지, 그러나 죽어서 더 사랑받은 시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되고서 4년 남짓 발표한 작품이라곤 많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주목은 받았지만 20대 중반인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의 유고 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죽음이다. 주식처럼 가지고 있는 안개로 인한 그의 불안은 개인적 불안을 넘어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상까지 가감없이 그려냈다.

참여시가 시절을 주도하고 있던 시기에도 그의 시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다. 적어도 독자가 기억하기에 죽음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이육사와 기형도 밖에 없다. 둘 다 요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

그의 시는 안양천변의 안개가 만들어냈다. 안개는 기형도 시인의 시적 모태이다. 안개로 출발한 그의 시는 주변인들의 죽음 이후 한층 깊은 완성도를 이루었다. 다시 펴든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나이가 훌쩍 든 지금에 와서 읽어도 울림이 크다.

80년대가 이성복 시인이나 황지우·최승자 시인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기형도 시인의 시대였다. 문학을 하는 이들은 시대의 길을 열었던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가슴 뜨거워했다.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고무판화로 찍은 흑백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시 기형도 밖에 없었다.

시인은 죽음을 맞기 전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라고 노래했다. 그런 측면에서 여전히 빈집에 갇혀 있을 것 같은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시 '빈집' 전문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인. 시를 쓰던 날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시인이 세상을 향해 '안녕'을 고하는 날, 겨울안개와 촛불들은 그의 죽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파고다극장 건물에 가면 시인을 만날 수 있을 듯

▲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집. 현재는 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 살림
1989년 3월 7일. 시인의 죽음을 유독 기억하는 것은 독자의 태어남이 음력으로 3월 7일인 까닭이기도 하다. 양력 4월 23일이 된 오늘 가리왕산 산자락엔 산벚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시인이 죽음을 맞은 날은 개나리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극장에 들어섰을 시인은 영화를 보면서 곧 맞이할 죽음을 어찌 받아들였을까. 난방도 없는 심야영화관에서 시인은 손을 다리 사이에 찔러넣고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화면을 응시했다. 그 시간 시인은 왕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아래 시에서 찾으면 무리일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시 '질투는 나의 힘' 전문


기형도 시인은 아픔이 많은 시인이다. 스스로 지닌 아픔은 견디다 못해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은 아픔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란 시에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했다.

20대 중반을 넘긴 시인이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대목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증거가 된다.

이미 늙은 시인, 그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였지만...

비에 젖은 파고다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고다극장에 가면 환영인 듯 영화관을 나온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우산도 받지 않은 채 긴 하품을 하며 철벅철벅 비 오는 거리를 걸어 나오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망연히 파고다극장을 바라보던 독자는 그런 시인을 좇아 네온이 밝혀진 거리를 따라간다. 시인의 걸음은 낙원동 거리를 돌아 인사동으로 옮겨지고, 시인의 뒤를 쫓는 독자는 그의 시집을 품에 안고 시인의 걸음을 따라 인사동으로 간다.

인사동 거리도 비는 내리고 그는 어느 좁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인 듯 '목련꽃 그늘 아래서…'라는 노래가 인사동 거리에 울려 퍼진다.

태그:#시인, #기형도, #문학,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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