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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웅 목사는 '교인 아닌 교인'들과 농촌 목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박순웅 목사는 '교인 아닌 교인'들과 농촌 목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 주재일
대형 교회를 목회하는 어느 목사가 한 강연회에서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는 시골 교회 목사를 질타하는 말을 한 적 있다. 이 목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음식점이 어디에 있든지 사람이 찾게 마련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동료 목사들에게 장소 탓하지 말고 목회 실력을 키우라는 뜻이다.

문제는 교회가 사람들이 먹고 떠나는 식당이 아니라는 거다. 특히 시골 교회가 처한 절박한 현실은 도시 주변에 멋들어지게 꾸민 음식점 흉내를 낸다고 풀릴 게 아니다.

강원도 홍천 동면교회(목사 박순웅)도 현상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는 시골의 작은 교회다. 박 목사가 부임한 1993년 교인이 40명이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는 80명을 넘나들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지만 많은 교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났다. 지금도 나이가 지긋한 교인들이 대다수다. 그렇지만 박 목사는 요란하지 않지만 다부지게 시골 목회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농사해야지요"

박순웅 목사는 초기부터 이러한 교회 현실에서 새로운 목회 방향을 잡았다. 주일 저녁과 수요예배만 남기고 새벽기도와 철야 예배를 없앴다. 교인들에게는 예배 수를 줄이는 대신 한번 제대로 드리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남게 된 시간은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다. 교인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한 권사는 박 목사에게 밭 1500평을 세금만 내고 쓰도록 빌려줬다. 이제 반은 농사꾼이 되었다.

이 밭에 고구마와 옥수수, 감자, 콩을 유기농으로 재배해 해마다 5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덕분에 본봉 60만원으로 시작한 목회자 사례비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가 지역 학교에서 미술과 영어 과목을 특기적성 교육을 해서 버는 수입을 합쳐, 네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박 목사가 생활비를 어느 정도 벌면서 이웃과 나누는 삶도 가능했다. 배추를 재배해서 교인들과 함께 절여 서울 교회들에 팔아 얻은 수입으로는 마을 애경사비로 쓴다.

해를 거듭하면서 농사량도 늘려 여름에 찾는 손님들에게 옥수수 2000통을 찐다고 했다(믿기지 않으면 가서 확인해 보자). 고구마도 주변의 친구 목회자들과도 나눠 먹을 정도는 재배한다. 농활 오는 대학생들과 자매 맺은 도시 교회의 청년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오기에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한다.

박 목사는 목회자도 흙을 갈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목사들도 할 수만 있으면 농사를 했으면 좋겠다. 다랑이 논이라도 지으면서 생명을 가꾸는 훈련을 몸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깊이도 달라지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심정까지 헤아릴 수 있는 도량이 생긴다"고 말한다.

또 그는 "대형 교회 목사가 솔선수범하면, 흔들리는 농촌의 많은 목사와 교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시골은 도시 청년들의 수련 공간

박 목사에게 농사는 제2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인연의 끈이 되기도 한다. 함께 유기농업을 하는 목회자들과 힘을 합쳐 서울 다섯 교회에 매장을 냈고, 도시의 청년들이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현장을 방문해 체험할 수 있는 장도 마련해주었다.

도시에서 젊은 손님들이 찾아올 때 처음엔 정말 농사꾼의 일정대로 일을 했다.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고 이제는 오후에 박 목사의 인맥을 가동해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한다.

박 목사는 한옥을 짓는 도편수, 목공소 사장, 한지 공방을 하는 이, 소나무 숯을 만드는 사람 등 주변에 나이가 비슷한 이들을 친구로 사귀고 있다. 이런 친구들로만 20여 명이 있어 2∼3일 일정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한 번에 두세 곳씩 세 해를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다.

박 목사는 홍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이러한 이들과 사귀는 것을 자신의 제2의 목회라고 말한다. 비록 그들 가운데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서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삶과 문화를 일궈가는 든든한 벗들이기에 교회 못지 않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한다. 특히 박 목사는 목회하는 심정으로 만나다 보니 그들도 '교인 아닌 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감리교농촌목회자들의모임 회원들과 함께. 아래 맨 왼쪽이 박순웅 목사.
감리교농촌목회자들의모임 회원들과 함께. 아래 맨 왼쪽이 박순웅 목사. ⓒ 주재일
미국·캄보디아·일본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박 목사가 농촌 벗들과 도시 청년들만큼 애정을 쏟고 있는 이들은 농촌 청소년들. 그는 방학이나 농한기를 이용해 이들과 함께 미국, 캄보디아 등을 오가면서 넓은 세상을 열어주고 있다. 올해 여름에는 일본을 자전거로 여행할 계획이다.

처음엔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박 목사가 이전에 목회하던 영월에 우박 피해가 나자, 박 목사는 농민들과 군청에서 시위를 한 적 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이동수 목사가 시위하는 기사를 보고 연락해 교제하게 되었고, 이 목사가 박 목사와 주변 목회자, 교인 등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이 목사는 비행기 값을 뺀 체류비 일체를 책임졌다. 다음해에는 박 목사가 이 목사 일행을 초청했다.

이러한 1998년까지는 미국과 한국의 목회자들이 격년으로 오가며 교제했다. 한국 사람들은 3주 정도 머물면서 미국의 각종 공동체와 유기농업 현장 등을 방문했고, 미국에서 온 목사들은 2주가량 한국의 농촌과 분단과 민주화운동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방문했다.

1999년부터는 중학생들이 교류했다. 미국 세 교회의 초청을 받은 한국의 청소년들은 오전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교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대신 한국에서 간 학생들은 우리 악기와 전통놀이, 문화와 역사를 소개했다.

해마다 15∼30명이 미국과 한국을 오가던 행사는 최근 장소를 캄보디아로 바꿨다. 한국에서 떠나는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방문해 함께 살면서 놀고 봉사하는 게 더 의미 있겠다는 판단에서다. 지금은 농촌 일곱 교회와 도시 두 교회가 참여하고 있다.

올해 여름에는 홍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다녀올 생각이다. 박 목사는 자전거를 타고 생태기행을 하며 농촌과 공동체, 대안학교를 돌며 아이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꿈꾸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박 목사는 농촌이라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자꾸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어, 농촌에서도 자본주의 세상에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당찬 청년들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도시 청년들에게는 생명에 거스르지 않는 유기농업을 하고 목공이나 공예를 하면서 농촌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보여줘, 꼭 도시가 아닌 곳에서도 대안적이면서도 넉넉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 목사에게 농사는 이들을 연결해주는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독교 대안 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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