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헷갈렸다.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한미FTA 재협상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웬디 커틀러 미통상대표부(USTR) 대표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 미 의회에서 한미FTA를 두고 재협상 요구를 해와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노동과 환경이 주요 쟁점이라고 했다. 미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노동권과 환경권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의회 인준이 어려울 수 있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국내 반응은 민감했다. 협상단은 즉각 재협상은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자구 수정 정도는 몰라도 틀 자체를 흔드는 추가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맞는 이야기다. 이미 끝난 일인데, 무슨 추가 협상인가?

미국의 FTA 재협상 요구, 그것이 궁금하다

▲ 웬디 커틀러 대표가 지난 3월 26일 한미FTA 최종 고위급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협상장에 들어서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궁금했다. 한미FTA 협상 타결에 반대해 온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왜 그럴까?

미국 민주당은 만약 의회의 요구, 정확하게는 민주당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의회 비준은 물 건너가게 될 것이라는 강도 높은 '압박'을 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재협상을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쪽에서도 한미FTA에 반대하는 쪽이라면 일단 민주당의 재협상 요구에 맞장구를 치고 나설 만도 하련만, 그런 반응은 없었다.

더 궁금한 것은 이상수 노동부 장관과 경제단체들의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이상수 장관은 노동시장의 경우 미국이 더 후진적인데 무슨 재협상이냐는 식의 주장을 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만 하더라도 8개 가운데 우리나라는 4개를 비준한 반면 미국은 2개 밖에 비준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었다.

협상을 끝내놓고 재협상을 하자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재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노동권에 관한 한 미국이 우리보다 더 낮은 수준인데 무슨 재협상 요구냐는 반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계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정반대였다. <한겨레>가 13일자 '정부 꼬이는 FTA 실타래'를 통해 소개한 전경련의 입장은 "만약 복수노조나 노조 전임자 임금 등 미 의회의 요구사항은 지난해 노사정이 합의한 로드맵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상수 장관의 말과는 달리 미 의회의 요구가 '재계'에 불리하며, 따라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미 의회는, 아니 미국의 민주당은 한미FTA와 관련해 무엇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는가? 그들은 왜 노동권과 환경권을 한미FTA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걸까? 정부는 왜 여기에 반대하는가? 이상수 장관의 말이 맞는가, 아니면 재계의 말이 맞는가? 한미FTA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까?

'반 한미FTA', 왜 아무 반응이 없을까

그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먼저 미 민주당이 한미FTA 협상에 추가로 요구하고 있는 내용들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속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윤곽은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서 대략 드러나 있다.

미 민주당 하원의원 16명이 3월 23일 노무현대통령과 수전 슈워브 미 무역대표부 대표에게 보낸 서한에는 미 의회, 즉 미 민주당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요약돼 있다.

이들 미 하원의원들이 요구한 것은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임금 계속 지급 ▲부당해고 노동자 원상회복 의무조항 삭제 및 정리 해고 예고 기간 축소 백지화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 ▲노동 기본권 보장 ▲ILO(국제노동기구) 권고 이행 조치의 신속한 실행 등이다.

이는 미 민주당의 '신통상정책'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다. 민주당 지배의 미 하원 세출세입위원회가 3월 28일 발표한 '신통상정책'은 노동과 환경 분야의 가이드라인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국제노동기구의 핵심 규약 도입 ▲다자간 환경 협정의 도입과 이행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특허권이 과도하게 사용되는 것에 대한 제어 ▲정부 조달 등이 특정한 노동 환경 법률을 위협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도록 규제 ▲투자자에게 미국 법체계 아래의 권한보다 더 많은 권한을 보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나 공화당 지배의 미 의회의 기존의 흐름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배치된다.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국제노동기구의 핵심 규약 도입이나 다자간 환경 협정의 도입이나 이행은 미국부터 해야 할 일이다.

이같은 요구는 마치 이라크에서 당장 미군을 철수하라는 민주당의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현재의 전비상태를 겨우 유지할 정도의 예산만을 승인해주겠다는 민주당의 모순적인 정책 표명이나 같은 맥락이다.

한 마디로 지금껏 해왔던 방식의 FTA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협상이 타결됐다고 하더라도 다시 검토하라는 강력한 지침인 셈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미 민주당의 전략적 선택과 정략적 계산도 깔려 있음직 하다.

'재협상 안 된다' 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 한미FTA 협상 시한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지난 3월30일 저녁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한미FTA 반대'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렇다면 이에 대한 우리(우리가 누구인지는 헷갈린다. 그렇다고 다른 말을 쓰기도 그렇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할 수도 없다는 한국 정부의 반응은 일단 정직하다. 하지만 이상수 노동부 장관의 발언은 정직한 것은 아니다. 미 민주당의 요구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우리가 그들보다 노동조건이나 노동권에서 낫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이 장관의 발언처럼 대한민국이 미국보다 ILO 핵심 협약 두 가지를 더 비준했다고 하더라도, 또 손쉬운 해고 등 미국의 노동여건이 우리보다 '신자유주의적'일지라도 결코 대한민국의 노동권 수준이 미국보다 낫다고 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미국측이 실질적으로는 아직은 한 단계 위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에 비하면 노동부나 환경부 등 정부 관련 부처의 반응은 솔직한 편이다.

노동부 쪽 관계자는 미 민주당과 공화당, 나아가 미 행정부와의 논의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우리나 미국(부시행정부)이나 미 민주당이 요구하는 노동권 수준을 한미FTA에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선을 그었다.

"가장 친환경적인 FTA를 했다"고 자신하는 환경부 쪽 사람들은 아예 더 이상의 '논의'나 '재협상'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쪽의 반응은 어떨까? 미 민주당의 재협상 요구 내용에 대한 평가에서는 정부와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 결론은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고려대상이 아니다."

한국 정부와 '반 한미FTA'의 합창

민주노총 등 노동계나 환경단체들은 미 민주당의 요구 자체는 '전향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한미FTA에 반대하기 때문에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에서부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미 민주당의 최종적인 목표는 결국 한국시장의 추가 개방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이다.

미국 스스로 ILO 주요 협약이나 생명공학안정성의정서를 비준하지 않고 있으면서 ILO 핵심 조약의 이행이나 다자간 환경협약의 준수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지적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미 민주당의 노동권이나 환경권 강화 요구를 마냥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또 미 민주당의 압력으로 미 무역대표부(USTR)가 재협상을 요구해 온다면 '안 된다'며 한국 정부와 '합창'을 하는 것이 한미FTA에 반대하는 쪽의 '유일한 선택'일 수 있을까?

'노동'과 '환경' 문제는 '인권문제'와 함께 이른바 선진국들의 가장 대표적인 '위선 상품'이자 '위선 전략'으로 활용돼 왔다. 형편이 나은 그들의 잣대와 기준을 강요함으로써 그럴 수 없는 나라들을 비난하고 정치적으로 압박하며,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유효한 압력수단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까지를 주고받는 FTA 협상에서라면 그래도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바로 '노동권'과 '환경권'일 수 있다. FTA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순기능적인 측면에 대해서까지 눈감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한미FTA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측면에 주목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꼭 FTA 순기능까지 눈감아야 할까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웬디 커틀러 대표가 미 의회의 '압력'을 거론하며 한국 측과의 재협상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협상이 타결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한 마디로 판을 깨자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을 커틀러 대표인들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누구한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즉각적인 반응은 한국 쪽에서 나왔다. 자구 정도는 몰라도 "재협상은 결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판이 깨질 것을 각오하라는 최후통첩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이런 완강한 입장 천명은 커틀러 대표한테 보내는 경고였을까? 아니면 미 민주당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까?

북한 핵문제도 확인했듯이 미국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부시행정부의 미국, 민주당 지배 의회의 미국, 한미FTA에 역시 반대하는 미자동차노조의 미국…. 한국의 모습 또한 다양하다.

바야흐로 멀티 플레이어 시대다.

태그:#백병규의 미디어워치, #백병규, #미디어워치, #한미FTA, #FTA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