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허세욱님을 가슴에 묻고 왔습니다. 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집회에서 마주치면 수고하신다는 인사를 건네곤 했는데, 안타깝게도 다시는 인사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한강성심병원에 도착하니, 영결식을 마치고 운구가 시작 되었습니다. 길게 검은 만장이 바람에 날리고, 그 뒤로 허세욱님을 추모하는 각계의 사람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민주노총 앞에서의 노제는 선배님의 유서를 읽는 것으로 가늠하였습니다.
민주노동당 관악지역위원회를 거쳐서, 선배님이 16년 동안 일하시던 한독운수에서 노제가 있었습니다. 영정을 모신 택시가 한독운수 마당에 들어서고 뒤를 이어 영정과 호상 장례위원들이 뒤따랐습니다.
한독운수 앞마당 노제에서는 관악주민연대 대표의 추도 말씀이 모두를 숙연하게 했습니다. 허세욱 선배님은 봉천6동 철거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살아서는 철거민으로 생활하시고, 죽어서는 병원 앞 길바닥에서 빈소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에 할 말을 잊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인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넘나들었을 한강대교를 넘어 이태원을 거쳐 하얏트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동네 어린이집에서 바깥 나들이를 나왔는지, 호텔 앞 공원에는 어린이들이 병아리처럼 재잘대며 지나가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햇볕이 모두의 머리 위에 비치고 있는 모습에 황망한 마음이 듭니다.
노제를 마치고 용산미군기지로 향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긴장하며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조용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시신이 빼돌려지고, 돌아가신 둘째날 새벽에 성남에서 갑작스레 진행된 화장에서 어렵사리 구한 고인의 유골을, 고인의 유언대로 용산미군기지에 뿌리고, 남영역까지 행진을 하였습니다.
시청앞 노제에서는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공동장례위원장님들의 조사에 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송경동 자유실천위원장의 추도시를 낭독하였습니다.
시는 마치 고 김남주 시인이 낭독하셨던, '학살'을 연상게 하는 가슴에 남는 시였습니다. 시를 낭독한 이후 시청 앞에서 송경동 시인과 잠시 이야기 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을 울리냐…" 자신도 시를 읽고 내려오면, 양손이 마비되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송경동 시인은 허세욱님이 돌아가신 4월 15일 한강성심병원 추도식에서도 만났습니다. 시인은 18일 새벽 2시에서야 시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추도식을 마치고 마석 모란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분신 이후 돌아가시기 15일 동안 님이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픔니다.
님이 분신을 결행하신 이유가 한미FTA를 체결하려던 미국의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공범자가 된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