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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텍 참사의 범인 조승희가 NBC 방송국에 보낸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미국은 물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적의에 경악하는가 하면 두서없는 횡설수설을 근거로 그의 심리상태를 추측하는 보도들이 잇따른다.

범인 조승희가 피해망상을 가졌거나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거나 우울증을 앓고 스토킹을 두 차례나 저지른 전력이 있거나, 그가 정신병자라는 사실임은 분명해 보인다. 즉, 버지니아텍의 참극은 한 정신병자가 저지른 병적 도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그 병적 징후를 미리 발견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 뭉크 /절규
ⓒ cgfa.sunsite.dk
동영상을 통해 표출되는 까닭모를 적개심과 섬뜩한 공포, 그리고 흔들리는 그의 불안을 보면서 기자는 한 점의 그림을 떠올린다. 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뭉크의 <절규>가 그것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는 사색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아웃사이더이자 일생을 노이로제에 시달린 신경쇠약증 환자였다.

그 때문인지 <절규>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공포심으로부터 광기를 일으키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선들은 동요하는 감정으로 물결치듯 굽이친다. 보는 이의 눈에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격렬한 리듬을 형성한다.

그 안에 갇힌 한 사람은 그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고통스러워 귀를 막고 있는 모습에서 실존을 견뎌야 하는 인간의 처절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고 그 긴장은 격렬한 색채의 분출로 팽팽해진다.

그 절규는 조승희의 것이고 고통스런 화폭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모름지기 예술이란 인간과 인간의 삶을 그 안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듯, 그림은 붓으로 기록한 인간의 삶이자 역사다.

뭉크의 <절규>에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힘겨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고독과 소외와 불안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니 조승희를 거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일이 아니다.

▲ 안토니오 사우루/아포리즘 연작
ⓒ cgfa.sunsite.dk
앙다문 입매무새와는 달리 초점 잃고 흔들리는 그의 표정에서는 20세기 에스파냐의 화가 안토니오 사우루의 아포리즘 연작 시리즈의 얼굴들이 오버랩 된다. 사우루는 삶의 비극성과 인간의 고독을 흑백의 강렬한 대조를 통해 초상화 연작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얼굴에서는 혼란한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가 기괴한 표정으로 드러난다.

▲ 고야/개(세부 포함)
ⓒ cgfa.sunsite.dk
고야의 그림도 떠오른다. 고야의 검은 그림들과 그 주제를 같이 하는 <개>는 노란 색의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삶의 비참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모래 늪으로 빠져드는 줄도 모르고 먼 곳만을 응시하고 있는 무표정한 개 그림에는 우리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숨겨져 있다. 또한 유난히 넓게 강조된 배경은 무한한 우주 가운데 던져진 유한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또 다른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산에서의 처형>과 이 그림을 원전으로 하여 한국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한 피카소의 <한국의 학살>도 생각난다.

▲ 고야/1808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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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한국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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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점령군에 대항한 스페인 민중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과 학살을 그린 고야의 그림에서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압살하는 전쟁의 광기를 경고한 피카소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비인륜적 범죄는 조승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개인과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라는 구별만이 있을 뿐이다.

동영상을 보면, 조승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극악한 행위가 마치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인 것처럼 강변하는 정신병적 징후를 여실히 보여준다. 악마에 영혼을 빼앗긴 사악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가 산 삶이, 그를 둘러싼 삶의 여건들이(어린 나이에 이방으로 이주한) 아무리 험난한 것이었을지라도 그의 병적인 만행은 연민과 위로조차 아까운 것이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언제고 조승희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송도 신도시 오피스텔에 몰리는 그 엄청난 청약 열풍이 반증하듯 물질만능과 수단을 도외시한 결과지상주의에 매몰된 우리의 영혼이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 말하지 못한다. 가파른 절벽에 위태로이 매달린 꼴이 우리의 모습이다.

무조건 올라가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여기 사악한 우리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한 점의 그림이 있다. 16세기를 살았던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보자.

악은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일그러진 얼굴, 움푹 들어간 눈, 메부리코, 이 빠진 입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두드러진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우매한 우리들의 얼굴이다.

▲ 히에로니무스 보스/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 cgfa.sunsite.dk
버지니아를 피바다로 만들고 세계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건맨 조도 그리스도를 참칭한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가 짊어져야할 십자가는 지지 않는다. 그림 속의 인간 형상들처럼 말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진 한 형상만이 오히려 온화하고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우린 이 교훈을 뼈 속 깊이 명심하여야 한다.

▲ 피테르 브뢰겔/죽음의 승리(세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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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보는 피테르 브뢰겔의 <죽음의 승리>는 바로 지금의 버지나아텍의 참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죽음을 끌고 가는 섬뜩한 손수레는 젊은이도 늙은이도, 왕과 추기경도, 광대며 하녀 등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실어 나른다. 오른 쪽 윗부분을 확대한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은 삶의 모든 문제들을 자기 안에서 구하는 자이고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자이며 자신의 성을 다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만나는 인간의 얼굴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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