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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인데 여기(뉴질랜드)는 가을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밤을 주우러 가자고 날을 잡았는데 바로 오늘(20일)입니다. 지난 일요일 뉴스 시간에 일주일치 일기예보를 유심히 보고서 아내가 마음대로 정한 날인데 요즘 보기 드물게 맑고 바람 없는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점쟁이가 아닌데 족집게처럼 가장 좋은 날을 골랐습니다.
밤을 줍는 곳은 우리 집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시골 농장입니다. 아침을 먹고 나자마자 부지런히 김밥 도시락을 싸서 며칠 전에 미리 예약을 해 놓은 농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50분. 도중에 동윤이의 친구 첼시(Chelsea)네 집에 들러 첼시를 태운 후, 함께 가기로 한 교꼬(Kyoko)네 집에 들렀습니다. 길을 잘 모르는 쿄꼬네 차가 우리 차를 잘 뒤 따라오도록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달렸습니다.
예약했던 시간보다 약 5분이 늦은 시간인 오전 11시 35분에 드디어 농장에 도착. 농장으로 직접 오기로 한 사유리(Sayuri)네가 벌써 와서 농장주인 데니스(Dennis) 옆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세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정원용 장갑을 양손에 끼고 한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쥐고 몇몇은 집게까지 챙기면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람 좋게 생긴 데니스가 밤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철망문을 열어주면서 말하기를, 지난주에 온 손님들은 한 명만 빼놓고 모두 아시안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첼시를 가르키며 "네가 두 번째 유러피언이야"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뉴질랜드에는 웬일인지 밤나무가 드물고 이곳에 사는 백인들은 밤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첼시도 마찬가지여서 밤을 줍는 것이 처음일 뿐더러 자기 집에서 밤을 먹어 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밤 줍는 일이 얼마나 신나고 또 신기하겠어요!
고슴도치처럼 무성한 가시로 무장하고 있는 밤송이들을 발로 짓이겨서 무장해제시킨 뒤 장갑 낀 손으로 고동색 윤기나는 밤톨들을 주워담는 일은 신나고 즐거운 놀이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짝을 지어서 밤나무 아래 잔디밭을 훑습니다. 자기가 주운 것이 더 크다고 서로 견주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오지 않았던 교꼬의 남편 카츠(Katz)도 밤 줍는 일에만 열심입니다. 평소에 참으로 수다스러운 사람인데 말입니다.
가장 나이 든 것이 고작 6년밖에 안 된 어린 밤나무들인데도 가지마다 밤송이들이 제법 많이 달렸고, 땅에서 주운 밤톨들도 실한 놈들이 많습니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실한 것들로만 골라서 비닐봉지를 반쯤 채워 어린 밤나무 숲을 나왔습니다.
멀리서 양떼들이 우리를 쳐다 봅니다. 데니스 말로는 양들도 밤을 좋아해서 그렇게 땅에 떨어져 있는 밤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럼 양들도 밤을 까서 먹을까요?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데니스의 창고에서 우리 식구가 주운 밤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니 4.4kg이고 가격은 11달러(약 7700원)이라고 하는군요. 슈퍼마켓에서 파는 가격의 약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싼값입니다.
먹성이 좋은 교꼬네는 우리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입니다. 셈을 치르고 나오는데, 내년에도 또 오라고 데니스가 말합니다. 그러마 하고 우리는 대꾸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밤을 수확하는 노동(?)을 했으니 이제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지요.
우리가 자주 가는 바닷가인 마레타이 비치(Maraetai beach)의 그늘진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싸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들을 꺼내어 나누어 먹습니다. 갈매기들이 날아가는 푸른 바다와 흰 구름이 걸린 수평선, 한가로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김밥을 먹습니다. 꿀맛입니다.
오리들이 뒤뚱거리며 우리 주위에서 알짱거립니다. 더 멀리서는 갈매기들이 안 그런 척하면서 우리를 은근슬쩍 쳐다 봅니다. 먹다 남는 거 있으면 버리지 말고 좀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안, 오늘은 다들 식욕이 너무 좋아서 너희들 줄 거는 없단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바닷가 모래밭에서 공을 차며 놉니다. 그러다가 시들해졌는지 멀리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바위 탐험에 나섭니다. 그 사이에 어른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한가한 시간을 즐깁니다.
오후 3시를 넘기면서 나무 그늘이 길어집니다. 아이들을 부릅니다. 왁자지껄 떠들며 돌아온 아이들의 손에는 뭐든 한 가지씩은 들려 있습니다. 오전에 밤을 주웠던 손으로 오후에는 바다를 주워서 돌아왔습니다.
그 중 가장 어린 미찌꼬(Michiko)는 동글동글한 바닷말을 아내에게 내밉니다. 사유리의 딸인 미찌꼬는 아내와 나를 참 좋아하는데, 그건 아내와 내가 미찌꼬를 정말 귀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고서 눈치가 빤한 미찌꼬는 선물이라고 바닷말을 아내에게 내미는 겁니다. 아내는 그걸로 미역국을 만들어 줄 테니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미찌꼬에게 말합니다. 미찌꼬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Thank you"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이들은 오늘 자신들이 누렸던 이 짧은 가을날의 한때를 기억할까요? 동윤이나 첼시는 다 컸으니 기억하겠지요. 특히 첼시는 밤을 줍는 일이 처음이었으니까 더 분명하게 기억할 테지요.
그럼 이제 겨우 네 살인 미찌꼬는? 확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문득 밤이 먹고 싶은 가을날이 있겠지요. 미역국이 먹고 싶은 가을날도 있겠지요. 그러면 그 이상스런 식욕의 끝에서 밤을 줍고 바닷말을 줍던 오늘을 만나게 될 거라고 믿어봅니다.
4월인데 가을이 밤처럼 익어갑니다. 익어서 가시 옷을 입은 채로 땅에 떨어집니다. 그 밤을 아이들이 줍습니다. 장갑 낀 손으로 줍습니다. 아이들이 줍다가 만 밤을 양들이 먹습니다. 양들이 밤을 먹을 때 껍질을 까고 먹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을 주운 아이들이 그 실한 밤톨처럼 야무지게 자라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밤을 줍던 가을날의 한때가 오롯하게 깃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