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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텍 총기 사건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사진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버지니아텍 교내 풍경.
ⓒ 김규영
비극적인 버지니아텍 총기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뉴스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지난 주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서였다. 마침 미국의 어느 저명한 유태인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 그쪽의 최종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혹시 그쪽에서 난색을 표하지 않을까 솔직히 조바심이 났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아마도 대략 나와 비슷한 조바심을 가졌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 생업을 꾸려가는 교민들이나 자식들을 거기 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더 착잡하고 무겁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일 TV와 신문에서 특집면을 할애하여 '한국인 조승희'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더니 미 대사관 앞에서 추모집회까지 열렸고 급기야 정부차원의 조문단이 가니 마니 한바탕 소란도 일었다. 대통령까지 유감 성명을 발표한 것을 보면 우리 모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퇴행적 혈통주의

이를 두고 전근대적인 식민지적 노예근성이니 속물적 민족주의니 하는 말들도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보다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퇴행적인 혈통주의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뼈의 품질(골품)을 따져 온 민족답게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뼈대와 혈통을 유난스럽게 따진다. 한국 사람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는 사람이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 주목받으면 누구 누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기어이 밝혀내고야 만다.

요즘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스포츠 선수들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릴 때면 으레 한국인 '특유의' 정신력이나 뛰어남이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해 보자. 박찬호 같은 선수가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그저 공만 빠른 별 볼일 없는 투수로 전락했으리라는 점은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야구선수로서 박찬호가 성공한 것은 물론 그의 훌륭한 재능과 자질 때문이었겠지만, 그 재능과 자질이 미국의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야구시스템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빛을 발했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린다.

이런 우리의 못된 버릇은 이번 총기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평소 그렇게 한국인의 혈통을 강조해 왔으니 흉악범이 혼혈도 아닌 순혈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나.

내가 민족주의라는 말 대신에 '혈통주의'라는 말을 고집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이렇게 혈통과 태생을 따지고 드는 것이 비단 물리적인 핏줄과 골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또한 심각하기 때문이다. 혈통주의의 특징은 개인의 과거 행적이나 현재 능력, 혹은 미래 잠재력보다 그 출신성분을 가장 중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최근 소위 명문대들이 3불 정책 폐지를 주장하고 나선 것도 이 순혈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3불 폐지를 요구하는 대학들의 주장은 결국 자신들이 공부 잘하는 우수한 학생들을 마음껏 뽑아갈 선발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이유가 단지 좋은 학생을 '뽑는 것'이라면 이들의 주장은 정당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명문대학들이 학생선발 자율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대학경쟁력이다. 대학경쟁력의 근원을 교수는커녕 재학생들의 현재 능력이나 미래 잠재력에서가 아니라 거꾸로 신입생들의 출신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고등학교의 '품질'을 따지려고 드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자기 학교 출신의 교수비율이 그렇게 높은 현실도 참으로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만든 서울대·연고대의 철옹성은 새로운 혈통과 골품을 만들어 내고 사회 대부분을 독식하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들을 좋은 대학 보내려는 게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음은 이 땅에 민주공화국을 세운 가장 큰 보람일진대, 여전히 우리는 상고출신의 '대통령'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아무리 사법고시 합격하고 판사 변호사하고 또 대통령까지 해 봐야 그 핏줄이 아니면 사람취급도 못 받는 것이 우리 현실이고 보면 그저 평범한 우리네 일상은 얼마나 고단한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위해 무리하지 않을 수 없고 아마 조씨네 가족도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성공에 대한 유난한 집착과 실패에 대한 가차없는 핍박의 이면에는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퇴행적인 혈통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

이번 총기사건에 대해 한국사회가 그토록 미안해하고 사죄하는 모습이 섬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에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상되는 광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번 사태와 한국의 대응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만약 외국인 노동자가 연쇄살인이라도 저질렀다면, 조승희 사건으로 손이 발이 되게 미국에 사죄하는 한국인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국가적인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우리보다 못 사는 어느 나라 사람들을 이웃처럼 대할 수 있을까?

우수한 학생 데려와야 대학경쟁력이 올라간다고 믿는 분들은 국가경쟁력을 위해 우수한 나라 국민들만 한국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여길 게 틀림없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수하지 못한 나라에서 여기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인간의 출신을 따지지 않고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공평하게 보장해 주는 나라가 진정으로 강대한 나라이다.

조승희씨에 의한 참극에 조의와 위로를 보내는 것은 아마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핏줄에 집착하는 지나친 '오버'는 진정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핏줄과 뼈대를 가진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 또한 그런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더불어, 아직까지도 핏줄 없는 혈통과 뼈대 없는 골품으로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의 퇴행적 관습이 여태 얼마나 많은 총기난사를 한국사회에 자행해 왔는지 되돌아볼 때다.

"21세기가 내일 모레야 (중략) 세상은 눈깔 튀어나오게 팍팍 돌아가는데 너는 언제까지 재떨이 타령만 할 거야?"

97년에 나온 영화 <넘버3>의 대사 중 하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미 21세기를 한참이나 살고 있는 우리는 또 언제까지 그놈의 핏줄타령만 할 셈인지.

덧붙이는 글 |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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