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보도블록 틈에서도 피어난 민들레꽃이 홀씨의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완연한 봄.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에서 옷가게와 슈퍼, 통닭집과 음식점들이 올망졸망한 골목길을 훈훈한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골목길에 익숙해지자 낯선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미터가 넘을 듯한 대형 벽화, 50여점이 넘는 부조가 퍼즐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꽃과 나무, 새들과 나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어린이와 노인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의 희망이 탑처럼 솟아 있었다.
민중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임옥상씨의 설치예술품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따라 미공군 폭격장 매향리의 평화를 기원하며 미사일불발탄과 폭탄의 탄피들로 만들었던 로봇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연대와 희망은 이렇듯 현장에서만 확인되는 것일까?
지하 2층인 원장실로 내려가면서 이 병원의 운영철학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악수를 하고 마주한 첫 인상은 우락부락한 얼굴과 큰 눈,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는 곰이라기보다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의 힘찬 산맥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었다.
말문보다 시선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웬 엽서예요?”
“예, 이 달에 생일을 맞이한 직원들에게 쓸 엽서입니다.”
시위와 수배, 도망과 감옥, 제적과 유학의 험난한 여정을 익히 들어왔던, 그래서 설렐 수밖에 없었던 사람. 작지만 직원을 향한 따뜻한 배려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는 고백을 흘러나올 것 같았다.
“제 꿈은 조금은 낭만적안 마도로스였습니다. 평발이라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시험이나 처 보자고 서울대 수학과를 지원했습니다. 수학에 제 일생을 걸 수 없다는 고민 끝에 농사를 지으려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함께 농사를 짓는 이웃들이 아플 때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었어요. 주사 한 대 맡기 어려운 이웃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의대를 지망한 동기가 되었지요.”
누에가 집을 짓기 위해 스스로 명주실을 뽑아내듯이 의대생시절을 술술 풀어놓았다.
“사회과학연구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공해조사활동과 농촌진료활동을 했습니다. 사북으로 의료봉사를 떠났을 때 일이예요. 인솔자인 레지던트 3년 차 선배가 반바지에 선글라스를 쓰고 기차에 오른 거예요. ‘선배님 그게 봉사활동 복장입니까! 당장 선글라스도 벗고 옷도 갈아입으세요. 선배님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건방진 태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지요. 마을에 도착해서 학생회 측에서 준비한 점심으로 카레라이스가 나온 거예요. ‘아니 명절 때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 무슨 호화판 요리입니까!’ 호통을 치고 점심을 굶어 버렸죠.”
불의에 당당했던 그의 대학생활을 들으면서 내 뇌리를 유유히 떠도는 것은 다름 아닌 내장까지 훤하게 비치는 빙어였다.
“제 별명이 ‘도발이’ 였습니다. 도망의 일인자였지요. 교내 시위를 주도하고 훌쩍 담장을 넘어 사라지고, 사복경찰들이 깔려 있었던 교내유인물 살포작전을 하고도 행동대원들이 수감된 한 참 뒤에 쇠고랑을 찼죠. 74년 1월, 웃음소리도 겁을 먹었던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대학 최초의 반유신 데모가 서울의대에서 일어났죠. 친구들이 3년 7년 형을 선고받을 때 이리저리 잘 도망을 다녔죠. 친구들을 모아서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문을 살포하게 되었죠. 모두 연행되었는데 저만 2달 뒤에 잡혔거든요. 그러니 도발이라는 별명이 안 붙겠어요.”
신학생시절 장기수 할아버지들 모임에 가서 알게 된 누님 수녀님의 증언이 떠올랐다. 그가 서울의대에서 제적을 당하고 유학을 가게 된 동기였다.
“누님 수녀님에게 듣기로 김수환 추기경 보증으로 유학을 떠났다는데 어떤 사연이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가 봅니다. 수배시절 어느 성당 사제관에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윤공희 대주교님을 알게 되었죠. 윤 주교님이 안기부장에게 당신이 보증을 할 테니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실무자 서랍 속에 감금되었던가 봐요.
어느 날 안기부장이 국가현안문제에 대한 고견을 듣기 위해 김 추기경님과 윤 주교님을 초정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윤 주교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양길승 학생 유학건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어떻게 된 거요’하고 말을 꺼낸나 봐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추기경님이 한 술 더 떠서 ‘그 친구라면 나도 잘 알지, 그럼 나도 보증을 설 테니 여권을 발급해 주시오.’ 거들었다고 합니다.
‘두 어르신이 부탁하니 그렇게 해야지요.’ 안기부장 말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서 전화를 했던가 봐요. 추기경님 인사가 걸작이지요. ‘잘 있었나? 내일 로마로 떠나는데 말야. 내가 보증을 서면 여권을 내 주겠다고 하니 빨리 와서 받아가게나.’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최고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두 분의 보증으로 유학길에 올랐죠. 허허…”
“유학생활도 철저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전두환 독재시절이었잖습니까? 한국에 있는 동지들은 수배와 연행, 고문과 감옥이라는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편안하게 공부하고 있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절 철저하게 생활하게 만들었어요. 아일랜드 겨울은 바닷가의 습한 기온 때문에 훨씬 춥게 느껴집니다. 차가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창문에서 친구들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천주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했습니다. 제 한달 생활비는 서양인들 하루 생활비였습니다.”
“어떻게 하루 생활비로 한 달을 살 수가 있어요?”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뼈를 버리잖아요. 정육점에 가서 유학생인데 뼈 좀 구할 수 있냐고 하면 공짜로 모든 부위를 얻을 수 있지요. 어떤 뼈들은 살까지 붙어 있어 그 살점을 잘 발라내서 구워 먹기도 했어요. 그 뼈를 고아서 파와 마늘, 후추와 소금만 넣으면 훌륭한 곰국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밥이야 쌀만 있으면 되잖아요.”
“장학금을 아껴서 영치금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예, 쑥스러운 이야기죠. 3년 동안 아끼니까 3백만 원이 되더라고요. 84년 말에 귀국해서 친구들과 양심수들 영치금으로 나누어 주었지요.”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한 끝에 아일랜드 골웨이의과대학에서 3년 만에 학위를 받고 아일랜드 의사고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면서도 중증인 사회에 청진기를 대고 진단하고 치료하는 사회치료사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에서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6개월 지방종합병원에 취업했다가 상경해서 구로구 가리봉동에 우리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환자들 4명 중 1명이 산재환자였어요. 자연스럽게 산재와 직업병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87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을 맡아 직업병과 산업재해, 의료서비스의 공공성실천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상봉동 진폐규명, 문송면 수은중독사건, 원지레이온 직업병 검진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경대군과 김규정양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에 함께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다보면 가족들과의 관계도 쉽지 않을 텐데요?”
“저희 집에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한번은 초등학고 3학년인 딸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옥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모 아저씨 감옥에 갔다 왔어요?’ ‘응’ ‘누구 아저씨는?’ ‘응 감옥에 갔다 왔지’ ‘그럼 누구 아저씨는?’ ‘그 아저씨도 갔다 왔지.’ ‘그럼 아빠는?’ ‘나도 갔다 왔지.’ ‘그럼 엄마는?’ ‘엄마도 그렇지’ ‘아니 엄마까지도!’ 하면서 눈이 땡그래 지는데, 그런 딸아이를 보고 제가 더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지한 이야기에 녹차가 식은 줄도 몰랐다. 병원 안내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00병동의 중소 병원인데도 복도의 공간이 넓어 보였다. 6층 재활치료실 남쪽으로 난 전면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환자 중심의 병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 문을 연 곳은 물리치료실.
“종합병원 물리치료실 직원이 14명 정도인데 저희 병원은 18명입니다. 공간도 지하에 있거나 좁은 공간인데 6층에 있고 공간도 100평이 넘습니다.”
노동의 역사 한 복판에 선 녹색병원, ‘하루 8시간 근무’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최소한의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로 시작된 70년대, 그리고 유신독재와 개발독재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의연한 저항, 독재의 탄압으로 추락사한 YH사건의 박경숙 열사가 추락사한 현장이었다.
그 후 가발공장이 문을 닫고 기독병원과 다른 병원으로 문을 열었지만 외환위기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병원을 인수하여 노동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녹색병원은 전두환 독재에 제적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떠난 아일랜드 유학이 그 희망의 싹이었다.
“제가 아일랜드 병원에서 실습할 때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노인환자와 여자 환자와 장애인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2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국의 종합병원에 가보면 노인 환자도 여자환자도 장애인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자환자가 적다는 것은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노인환자가 없다는 것은 사회복지가 미흡하다는 증거고, 장애인이 적다는 것은 장애인을 보살피고 돕는 병원이 소수라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급선기 질환의 응급처치만 하고 있다는 증거죠. 유럽에서는 작은 병원에서도 의족과 위수를 제작합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종합병원에서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산재나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들이 많은 탓인지 6층 병실 복도에는 휠체어가 복도 한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400병상인데 휠체어가 100여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기존건물 세 곳을 위에서 아래로 통째로 파내어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대나무를 심었지만 잎사귀는 없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환자중심의 병원은 설계 당시부터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원진재단의 노동자센터 문을 열고 들어간 양 원장은 필요 없는 등을 끄고 담배 공초를 줍는 것이 원장의 일이라며 스위치를 찾았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 큰일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국제기준의 노동현장측정을 할 수 있는 두 곳 중의 하나인 노동자센터를 운영하는 이사장은 그러한 작은 일에서 시작된 것이다.
환자중심의 병원은 마치 미술관을 방불케하는 전시물들에서 드러난다. 임옥상씨의 그림과 여러 작가들의 사진과 그림이었다. 8인실에는 6명의 환자만 입원해 있고 복도에는 가로세로 40X100Cm 큼직한 개인사물함이 있었다.
남향의 건물을 이용해 햇빛이 잘 드는 복도에 평상을 연결해 놓은 듯한 쉼터에서 면회 온 가족들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콘크리트나 타일계단 대신 나무 계단을 만든 것도 인상적이었다. 원장과 직원들이 마주칠 때마다 주고받는 대화의 풍경은 가족들의 만남처럼 포근했다. 한 달에 한번 전 직원이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는 날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한방병원과 치과, 중환자실과 응급실 등을 돌아보고 현관으로 갔다. 게시판에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병원임을 알 수 있는 알림판이 있었다. 지역주민이 후원하는 만큼의 액수를 병원에서 지원해 환자방문 의료활동과 지역주민 의료복지활동을 펼치고 있는 상황판이었다. 그 옆에는 사랑의 고리라는 꽃이 피어있었다.
“2005년 6월 고 유민자(글라라)님이 모든 유산을 카톨릭 여성장애인 공동체인 <사랑의 고리>에 가장 필요한 이웃을 위해 합당한 곳에 써달라고 기부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고리>에서 녹색병원에 그 유산을 맡기셨습니다. 녹색병원은 이를 <사랑의 고리기금>으로 이름 짓고 사랑의 고리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콘크리트 벽에 피어 있었다. 그 벽을 따라 녹색병원의 상징인 23미터의 벽화를 지나 병원 입구 오른편에 자리 잡은 기념비 앞에 섰다. 투명한 아크릴 기념비의 문자를 나지막한 소리가 따라간다.
“건강하게 일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쓰러져 갔다. 그 시대적 희생을 바꾸어 병을 이겨내고 생명을 보호하는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직업병의 대명사였던 원진레이온이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로 다시 살아났다. 이것은 죽음을 넘어선 승리다. 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의 고귀한 희생과 이들과 뜻을 함께 한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사랑의 결실이다.
녹색병원은 나눔과 봉사를 실천함으로서 삶의 질을 높이고 건강한 녹색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녹색병원을 만든 원진 직업병환자들과 함께 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여기 조촐한 기념비를 세운다.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서 슈바이처가 아니라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의 길을 선택한 체 게바라의 삶을 살려고 부단히 노력해온 의사의 길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삶은 슈바이처이지만 그의 삶을 배후조종하는 철학과 사상은 체 게바라였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안언론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