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조폭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들이 얻어맞은 복수를 한답시고 쇠파이프 따위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우르르 끌고 가서 술집 종업원들을 감금하고 두들겨 팬 것이다.
이 바람에 한화그룹은 초상집 분위기다. 직원들은 "회장이 그런 일을 할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창피해 죽겠습니다"라든가 "밖에 나가 한화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다"고 한다.
회장 잘못 둔 탓에 직원들까지 애꿎게 고생인 셈이다. 사실은 일반 국민도 창피한 생각이 든다. 10위 안에 들어가는 그룹의 꼴이 이 정도라면 한국이라는 나라를 밖에서는 어떻게 볼지 뻔하지 않은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노블리스 오블리제(고위층의 도덕적 책임)'는커녕 어떻게 일반인보다도 저급한 행태가 일어난 것일까.
'무법자 김승연'을 키운 것은 정부의 재벌사랑
재벌총수도 자식사랑이 너무 지나친 한국 부모의 한 사람인지라 자식 기 살리기 위해선 할 일 안할 일 가릴 게 없어서였을까. 어쩌면 <친구>니 <조폭마누라>니 하면서 우리나라에 폭력배 영화가 너무 유행한다 싶더니, 혹시 김회장도 이런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모방충동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근본적 요인은 김 회장 같은 재벌총수에게는 법질서가 우습게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회장님 아들을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려 한 김 회장은 법질서를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가볍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3년 이상의 처벌을 받는 엄중한 죄를 함부로 저지를 까닭이 없다.
김 회장이 무법자가 된 데는 우선 자신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2004년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얼렁뚱땅 넘어간 일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도 제대로 조사를 받지 않았다. 이번 폭력사태도 압력을 넣어 거의 뭉개버린 상황이었다.
다른 재벌총수의 경우를 보고 김 회장이 좋지 않은 '학습'을 하기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회사 돈을 불법으로 빼돌린 두산 총수가 구속되지 않았고, 불법증여에 책임 있는 삼성총수는 아예 소환조차 당하고 있지 않는 사례가 그런 것들이다.
이전의 대통령들도 그랬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면서 두산과 삼성 총수 등에 대해 법질서를 유지하는 최고통치자의 의무를 방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판이니 김승연 회장과 같은 재벌총수들이 스스로 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재벌개혁 손놓고 있어선 안 된다
그러나 재벌총수들이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고 정부도 이를 바로잡는 재벌개혁을 등한시하면 IMF사태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나라가 도탄에 빠진다. 그게 재벌체제의 모순이다.
재벌체제의 모순은 소인국의 걸리버 문제로 비유할 수 있다.
소인국의 걸리버는 다른 소인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소인국에선 걸리버가 술에 취해 함부로 거리를 나다니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나라를 손아귀에 넣으려할까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걸리버는 결국 소인국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재벌기업도 걸리버처럼 국제경제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벌의 힘이 지나치게 거대하다고 재벌을 걸리버처럼 추방할 수는 없다. 재벌기업은 걸리버와 같은 '외계인'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재벌이 술 취하지 않고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길밖에 없다.
이게 재벌개혁이다. 술 취하지 않게 하는 게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이고,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게 재벌에 대한 견제력, 즉 민주주의의 강화다.
그런데 IMF사태 이후 재벌개혁이 시작되긴 했으나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렀다.
특히 현 정권 말기에 와선 공정거래법 개정과 생명보험사 상장 문제가 반개혁적 방향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법질서를 짓밟은 김승연 회장 사태는 바로 이런 흐름의 산물이다.
김 회장의 '반기업 행위' 멈추게 해야
한화 직원들은 망연자실해 있겠지만 이 사태가 그들의 책임은 아니다. 회장을 자기들이 선출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네티즌 가운데선 한화그룹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는 잘못된 반응이다. 한화라는 기업도 피해자다.
반기업 정서가 강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진단이다. 김승연 회장과 같은 재벌총수에 대한 '반기업인 정서'는 강해지겠지만 이게 기업을 미워하는 '반기업 정서'는 아니다.
수구언론에선 일반국민의 '반기업 정서'가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왜곡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재벌총수의 반기업 행위'다. 재벌기업과 재벌총수를 올바로 분별해야 재벌개혁이 가능해진다.
한화처럼 총수가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는 기업의 이미지를 먹칠하고 경영을 위태롭게 한다. 경영능력과 무관하게 단지 창업주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수 자리를 물려받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요컨대 외부적으로는 재벌에 대한 민주적 견제력이 작동하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총수가 왕조적 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화 김승연 회장의 활극 같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먼저 김승연 회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마 회사 취업규칙에 직원이 조폭과 비슷한 행위를 하면 해고하게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경영자로서의 김 회장도 직원에 속한다.
그리고 두산 총수처럼 잠깐 비난을 피할 요량으로 물러나서도 곤란하다.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일시 도피하는 것은 대선 불법자금 수사 때 한번으로 족하다.
이 참에 경영 일선에서는 완전히 물러나고 선진국 대기업의 경우처럼 주주총회에서 대주주 권한만 행사하면 된다. 조폭같은 김 회장보다 능력 있는 전문경영자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결국 회장도 직원... 해고되는 게 마땅하다
또한 재벌총수들이 세상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외압에 직무를 유기했던 남대문경찰서는 담당경찰 숫자로 모양만 낼 게 아니라 철저히 수사를 진행하고 앞으로 검찰과 법원도 관련자를 엄정 처리해야 한다.
'재벌(총수) 멋대로 세상'은 정계·관계·법조계·언론계·학계가 '재벌의 덫'에 빠져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대오각성하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본연의 모습을 갖추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김 회장 사태는 한편으론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우리나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천박한 수준을 드러낸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작태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탓에, 꺼져가는 재벌개혁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과제인 선진화는 책상에서 로드맵을 그리거나 무턱대고 한미FTA 체결해서 단번에 달성되는 게 아니다. 김 회장 사태와 같은, 바로 눈앞의 문제 하나하나를 정도(正道)로 처리하는 게 곧 선진화다.
덧붙이는 글 | 김기원 기자는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