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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1일 개봉된 다큐멘터리 홍보사이트 첫 페이지. 뒤에 보이는 글인 'LIP VIVRA' 는 'LIP,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뜻이다.

현대사회를 다각층에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프랑스 내에서 자주 개봉되고 있다. 픽션영화가 다루지 못하는 소재들을 다큐멘터리라는 다른 형식으로 접근함으로써 픽션영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관객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때문인지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나름대로 꾸준한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지난 3월 21일 파리의 몇몇 소극장을 비롯해서 프랑스 전국의 20여 극장에서 개봉된 다큐멘터리 < LIP, 권력에의 상상>도 그 중의 하나에 속한다. 크리스티앙 루오가 제작한 이 영화는 73년에 브장송에 있는 LIP 공장에서 일어난 독특한 장기파업의 모습을 당시 파업의 중요인물들의 인터뷰와 몇몇 실제 사진으로 재현하고 있다.

우선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인 < LIP, 권력에의 상상>은 프랑스 68혁명의 슬로건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이 68혁명은 즉각적으로 노동자층에까지 번져 100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프랑스인이 3주 동안 파업에 가담함으로써 프랑스 전국을 마비시켰던 사건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 기존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형식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자주관리 사고가 사회 전반에 팽창했었다.

1973년 6월, LIP 시계공장에 대대적 파업이 일어났을 땐 68혁명의 정신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을 시기였다.

파업만으론 부족해, 판매도 우리가 하자

LIP 근로자 중의 하나가 우연히 간부의 가방 속에 들어있었던 쪽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 파업의 원인인데 거기에는 '(총종업원 1200명 중에서) 480명 목자르기' 라는 표현이 적혀있었다. 불어로 'degage'라는 단어를 기자가 '목자르기'라는 단어로 표현했듯이 이 단어는 상당히 경멸적이며, 더욱이 1970년대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던 과격한 단어였다.

흥분한 종업원들은 자기들을 해고하려는 고용주에 대항하기 위해 파업을 감행한다. 당시 LIP는 노동자 조합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던 공장으로 모든 결정은 조합원들의 다수 결정으로 이루어지고는 했다.

그러나 파업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노동자들도 고용주 못지않은 세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은 창고에 쌓아둔 시계를 전부 압수하여 고용주 모르는 장소에 보관함으로써 그 세력을 획득하게 된다.

이후 LIP 노동자들은 브장송 시내에서 몇 차례 대규모 시위행진을 하면서 여론을 자극하였는데 당시 브장송 주교가 브장송 대성당 앞에 모인 시위자들 앞에서 이들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이들을 위해 대성당의 종도 울리는 기념적인 행동을 했다.

파업이 며칠째 진행되자 일부 파업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장을 우리 손으로 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기 위해선 시계를 계속 생산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이들은 이전처럼 시계를 생산하게 된다. 생산된 시계는 팔아야 했다. 그러나 경영주의 기존 판매망을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다시 머리를 굴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생각해 낸 것은 직영판매였다.

이들은 공장 정문 앞에서 시계를 직접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시계를 판매한 금액으로 이들은 스스로 월급을 챙겨갖는 역사에서 보기 드문 행적을 이루어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슬로건이 된 '모든 게 가능하다. (우리 스스로) 생산하고 판매하고 월급 받는 것'이다.

당시 브장송을 비롯한 같은 지역사람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LIP의 '자업자족'을 지원하고 나선 많은 이들이 브장송에까지 와서 이들이 생산한 시계를 사갔다.

소문을 들은 외국인까지도 상당수가 LIP 공장에까지 와 시계를 사가는 혁신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프랑스인들은 1주일 혹은 2주일 되는 여름휴가를 LIP 공장에 와서 다른 근로자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했다.

노동자만으로 된 유토피아가 사라지기까지는

▲ 다큐멘터리 홍보신문에 실린 그림. 그 유명한 '생산해서 팔고 월급 나누어 갖는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런 유례없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좌절로 끝난 이후,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기존과 다른 사회건설이 일부 LIP 공장에서라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영주 없이 오로지 노동자들만으로 된 민주적이고 근본적이며 자주자립의 공적 유토피아를 일시나마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꿈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가치들이 이들 노동자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LIP 노동자들이 스스로 구축해 낸 '신세계'는 1973년 8월까지 지속되고 주변의 많은 시계노동자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찰에 의해서 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LIP 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은 굳건했다. 이들은 단념하지 않고 브장송 시내에 있는 마을체육관 등 여기저기에 소형 작업장을 구성하여 시계판매 영업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강한 투지와 의지력 앞에서 경영진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1974년 초, LIP 경영주 측은 몇 차례에 걸쳐 서서히 종업원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해서 단 한 명의 해고자 없이 모든 종업원들을 다시 제자리로 복귀시켰다. 노동자들의 완전 성공이었다.

그러나 LIP 노동자들의 성공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2년 후 지금까지 LIP에 시계를 주문했던 국영업체인 르노가 주문을 완전히 취소하게 되고 브장송이 속한 두(Doubs) 지방의 다른 시계 제조업자들도 같은 동료인 LIP에 등을 돌리는가 하면, 은행마저 융자를 거부함으로써 LIP는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성공으로 끝난 LIP의 파업이 향후에 다른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 문제 많았던 LIP를 재계에서 영원히 사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때의 대단했던 희망은 어디로 갔나"

이 다큐멘터리 제작자 크리스탕 루오는 'Evene.fr'라는 사이트와 행한 인터뷰에서 "68혁명만 알고 70년대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의 상황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이 세대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LIP의 파업사건을 프랑스 68혁명의 연장선상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이 둘의 상관관계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영화를 보러 간 날, 영화관 앞에서 길게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주로 이 시기를 몸으로 직접 겪었을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영화 상영 이후에 제작자와 파업 주동자 몇 명과 토론이 이루어질 예정이어서 그런지 극장은 만원을 이루었고 결국 기자는 원하던 시간대가 아닌 그 이후 상영시간으로 관람을 미룰 수밖에 없을 만큼 영화는 관객동원에도 성공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미디어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어 <리베라시옹>은 3월 20일자에서 "그동안 프랑스 사회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잘 된 영화중의 하나"라고 칭찬했으며 "이 영화는 현재 서양사회 고용위기의 근원을 알려주는 특별한 영화"라고 덧붙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조젯트라는 젊은 여성은 <알로씨네>라는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감상을 적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와 이들이 젊음을 불살렸던 70년대와는 너무나 심한 차이가 있다, 70년대 당시의 그 대단하던 삶에 대한 집단적 의욕은 지금 어디로 사라지고 많은 젊은이들의 희망이 단지 평면화면 TV를 갖는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는가?"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 파업 당시 브장송 시위장면.
프랑스 전국을 뒤흔들며 정치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LIP 공장 사례는 우리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이들의 성공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단결심이다. 조합원이든 아니든 모든 종업원들이 단결심으로 똘똘 뭉쳐 업주와 강력히 대항함으로써 엄청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 파업을 이끌어간 리더들의 겸손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보통 리더들이 갖기 쉬운 자만심이나 다른 종업원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고방식이 전혀 없이 모든 행동을 종업원 다수의 결정에 의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철저하게 운영했다.

리더로 알려진 피아제는 아무런 사심 없이 오로지 근로자 다수를 위해 조합원 운동을 한 사람으로 그가 업주 쪽과 협상을 하러 갈 때마다 조합원들이 그에게 거는 신용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피아제를 보조하는 제2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비토는 부드러운 성격의 피아제와는 달리 고집이 센 성격으로 과격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다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들의 파업을 항상 한 발짝 향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토는 폭력을 혐오하여 파업자들이 폭력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려고 할 때마다 이를 무마시켜 LIP의 파업이 한 치의 폭력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노동자 출신이 아닌 간부 중의 하나였던 자넹그로라는 사람은 그 위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편에 서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싸웠는데 그는 수 백명의 노동자들의 몇 달 월급을 보관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희망이 있으면, 다시 날 수 있다

조금만 사심을 가져도 탈선할 수 있었던 요인들이 아무 사건 없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대부분이 AOC(가톨릭노동자투쟁)에 속한 정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파업 이후 차압했던 시계와 기계, 팔고 남은 시계 등 모든 재물을 100% 회사에 반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인간이 고용주와 고용자로 나뉘지 않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수개월에 걸친 파업기간 동안 우리가 꿈 속에서만 그려왔던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

희망은 우리 몸에 날개를 부여한다.

태그:#프랑스, #영화, #파업,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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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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