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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살게 되면서 매년 기억하고 축하해야 하는 기념일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땅을 떠나 이민자로서 뉴질랜드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날. 유효기간이 지난 구여권을 꺼내 아직도 선명하게 찍혀 있는 뉴질랜드 입국사증의 날짜를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날.

다시 말해서 여기 뉴질랜드에서 우리 가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민 기념일'인데, 지난 금요일(4월 28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우리 가족, 대견하고 고맙다

올해로 여섯 번째가 되니 우리 가족은 이를테면 아직도 초등학교 문턱을 밟지 못하고 있는 코흘리개 어린애인 셈인데,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도 잘 적응을 해서 살고 있으니 대견스럽고 또한 고마운 일이다.

'대견스러움'은 피붙이나 친한 친구 하나 없는 생판 낯선 땅에서 그동안 큰 사고나 질병, 그리고 마음 근심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온 가족들을 향한 것이며, '고마움'은 그게 가능할 수 있도록 품을 벌려 받아 들여주고 틈을 내어 자리를 내준 이곳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그래서 매년 이민 기념일이면 우리는 저녁 외식으로 자축하곤 했는데, 올해는 아내와 딸아이가 좋아하는 숯불돼지갈비를 메뉴로 골랐다. 우리 동네에는 그런 데가 없어서 1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하는데다 가격도 제법 비싼 축에 속하는 한 한국 식당에 다녀와야 했지만, 차에 오르는 내 마음은 편하고 즐거웠다. 조금의 후회도 없고 일말의 불안도 없이 맞이하는 이민 기념일이니 이만한 호사는 누릴 만 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민 와서 처음 1~2년 동안은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낯선 환경과 문화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불안감이 떠나온 고국을 남몰래 그리워하는 향수병과 수시로 섞여 감정의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끔 짜증으로, 한숨으로, 초조로 부글부글 솟구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솟구치는 마음을 내가 가라앉힐 수 있게 된 것은 운전을 하거나 산책을 하다 보면 거리에서 늘 마주치게 마련인 교통표지판들의 의미를 새롭게 재발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양보] 꿈과 돈, 현재와 미래... 뭘 양보할까

▲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교통 표지판인 '양보 표지판'.
ⓒ 정철용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양보 표지판이었다. 도로가 서로 만나는 경우에 눈에 잘 띄는 도로변에 세워놓거나 아니면 도로상에 흰색 페인트로 커다랗게 써 놓은 양보 표지판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교통표지판이다.

양보 표지판은 너무나 흔해서 자칫 무시해 버리기도 쉽지만, 다른 도로를 달리면서 서로에게 다가서는 차의 운전자들에게는 어느 쪽이 양보를 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준다는 점에서 생명을 구하는 표지판이기도 하다.

이처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나도 양보 표지판 앞에서는 습관적으로 속도를 줄이고 도로의 좌우를 살폈던 것인데, 사소해 보이는 그 일이 사실은 생명을 살피고 삶을 도모하는 일이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이 흔해빠진 양보 표지판을 더 이상 사소하게 여길 수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양보 표지판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사고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을 빗겨갈 수 있다는 사실의 새삼스런 인식은 단순한 만큼이나 큰 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삶을 누리면서 한가롭고 여유있게 살기 위해서 이민을 선택한 것인데, 지금 내 삶의 모습이 과연 그러한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는 곳만 바뀌었다 뿐이지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여전히 욕심과 근심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리라는 꿈과 지금 이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누리면서 소박하게 살아가자는 다짐은 돈벌이 없는 백수 생활의 불안감에 치고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그런데 양보 표지판이 그런 나의 마음을 후려친 것이다. 꿈과 돈벌이 중에서 어느 것을 양보할 것인가? 가난하지만 소박한 현재와 풍족해 보이지만 불확실한 미래 중에서 어느 것을 양보할 것인가? 대답은 자명했다. 양보 표지판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돈벌이 쪽으로 급하게 기우는 마음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밟기로 했다.

양보 표지판 앞에서는 때로는 아주 멈춰서서 다가오는 차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다가오는 미래에 충돌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세우고 현재에 멈추어 서 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고 현재를 누리게 되었다. 새로운 의미가 담긴 양보 표지판이 인생의 중반 마흔 고개를 넘어가던 사내의 마음에 세워졌다.

[원형교차로] 헤매도 돼, 돌아올 수 있으니까

▲ 온 길로 다시 되돌아가는 유턴이 가능한 원형교차로 표지판.
ⓒ 정철용
하지만 마음 속에 굳게 세운 양보 표지판을 내 인생의 새로운 길잡이로 삼긴 했어도 가끔씩은 마음이 흔들려서 길을 잃고는 했다. 초행길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나는 서글퍼졌다.

마흔이 다 되어서 스무 살 무렵에 꾸던 꿈을 좇다니 그게 가능한 일일 것인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 미래를 도모하지 않음은 직무유기가 아닌가? 다시 터져나오는 물음 앞에서 양보 표지판은 희미해지곤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다잡아 준 것 역시 교통표지판이었는데, 그것은 원형교차로 표지판이었다. 여기서는 흔히 '라운드 어바웃'이라고 불리는 신호등 없는 원형교차로가 곧 나타남을 알려주는 교통 표지판이다.

원형 교차로는 신호등이 없는 대신 교차로 중앙에 둥근 교통섬이 있고 그 주위를 도는 차들이 직진·우회전·좌회전·유턴 등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 없는 교통체계여서 나 역시 익숙해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자신의 우측에서 교차로에 진입하는 차량에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어서 일단 익숙해지자 신호등이 설치된 교차로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하기도 했다.

특히 길을 잘못 들었을 경우에는 멀리 가지 않고도 이 원형교차로를 유턴해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 바른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 초보 이민자였던 만큼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그토록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점차 익숙해져서 이제는 심상해졌던 원형교차로 표지판이, 내가 양보 표지판으로도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자, 여기서 유턴을 해서 돌아가 다시 길을 찾아보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찾고자 하는 길에서 좀 멀리 벗어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유턴해 돌아와서 다시 길을 더듬어 나갈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런 삶에는 실패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헤매지 않고 바로 길을 찾아가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겠지만, 그렇게 길을 헤매면서 만난 낯선 길들이 때로는 나의 현재를 더 풍성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비록 에둘러가는 길로 보이겠지만 돌아가는 이 길이 사실은 꿈의 성취로 이어지는 지름길임을.

길을 잃고 헤매는 시련의 시간이 사실은 바른 길눈을 익히게 해준 수련의 시간임을. 바로 가지 않고 때로는 에둘러서 돌아가는 길이 어쩌면 인생을 배우는 더 나은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원형교차로 표지판을 만날 때마다 가슴에 새기곤 한다.

[오리 가족] 이 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 오리들이 건너다니는 길이니 조심해달라는 '오리 가족 조심(?)' 표지판.
ⓒ 정철용
그렇게 양보하면서 또 에둘러가면서 지난 4~5년간 이 곳에서 삶을 살아왔어도 내가 무상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오클랜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크고 번화하고 번잡한 대도시인데도, 전혀 대도시 같은 느낌이 안 들도록 사방이 푸르고 깨끗한 자연환경이 나는 무엇보다도 좋았다.

곳곳에 자리한 크고 작은 공원들에서는 새들의 노래 소리가 사철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데, 때로는 공원에 놓아 기르는 공작새가 활짝 날개를 펼치고 있는 눈부신 자태도 만날 수 있었다. 자동차로 10분 거리 이내에 있는 한적하고 운치있는 바닷가는 또 어떤가.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에 취해서, 읽으려고 들고 온 책을 펼친 지 5분도 안 되어 다시 덮고 바다를 바라보곤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런 아름다운 자연이 주택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 나를 매혹시켰다. 우리 동네 주택가 길가에 세워져 있는 이 아름다운 표지판을 보라.

뭘 모르는 사람은 엄마 오리와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새끼 오리 두 마리를 그린 이 표지판을 귀여운 농담쯤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실제로 우리 동네 어느 집 정원 앞에서 알을 품고 있는 야생의 오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이 표지판은 실제로 운전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교통 표지판인 것이다. '여기 이 길은 오리 가족이 자주 건너는 길이니 조심해 주세요.'

이 땅은, 이 지구는 인간의 것만이 아님을 이 표지판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루기를 원하는 꿈이,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오직 나만의 것임은 아님을 이 표지판은 말하고 있었다. 뭇생명들과 함께 꿈 꾸고, 뭇생명들과 함께 이 순간을 누릴 것을 이 표지판은 내게 아주 부드럽게 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 하나의 표지판을 가슴에 새겼다. 자연과 더불어 내 꿈을 키우고 자연과 더불어 이 순간을 누리겠다는 다짐이 어미 오리와 그 뒤를 졸졸 따라 가는 두 마리 오리 새끼의 모습으로 내 가슴에 새겨진 것이다.

'이민 기념일', 즐길 만한 이유 있네

이렇게 뉴질랜드의 거리에서 마주친 세 개의 교통 표지판을 내 삶의 표지판으로 삼아 가슴에 품고 나는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내가 꿈꾸던 목적지는 아직 아니지만, 그래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올해 여섯 번째로 맞이한 우리의 '이민 기념일'을 내가 조금의 후회도 없이, 일말의 불안도 없이 맞이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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