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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가을 쯤으로 기억된다. 유동근 황신혜 주연의 드라마 <애인>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성 혹은 사랑에 대한 사회적 담론으로 세간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애인 신드롬을 일으킨 이 드라마는 '아름다운 불륜'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어울리지 않는 의미소의 결합으로 국어법의 근간까지 흔들어 놓았다.

당시 주인공이었던 유동근이 즐겨 입고 등장했던 블루 계열의 드레스 셔츠는 불티나게 팔렸고 지금은 월급쟁이 일꾼들의 대표적인 트렌드 패션이 되었다. 그 뿐인가. 드라마에 삽입되었던 Carry & Ron의 'I.O.U'는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로, 현재에도 한국인이 즐겨듣는 명품 팝송의 선두에 늘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사랑이라지만 엄연히 배우자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인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는가 하면, 비록 그들이 어긋난 운명에 의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황일지라도 그들의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는 도덕적인 잣대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 등이 분분하였다.

이런 견해들은 다시 말하면, 남녀 간의 사랑을 결혼이란 제도만으로 규정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깊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 이전에 책임이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견해의 다툼이다. 양자의 견해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결혼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할 수 있는가, 간통죄의 경우처럼 개인의 사랑을 국가 혹은 사회가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비화된다.

어떤 견해가 공동체의 안정과 개인의 행복이라는, 이 충돌하는 인식 사이에서 최소한의 선을 실현할 수 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벌써 세월은 10년여를 훌쩍 뛰어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격세지감을 오늘의 드라마들은 여실히 보여준다.

결혼이 문제일까 사랑이 문제일까

ⓒ imbc.com
그토록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던 '불륜'이라는 소재는 이제 더 이상 시청자에게 불편한 것이 아니다. 네모난 상자에서는 거의 매일 불륜이 가장 뜨겁고 진실한 사랑의 양식인양 드러난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흡인력으로 그들을 동여맨다.

세월이 흐른 만큼 오늘의 주인공들도 그만큼 영악해져 있다. 결코 '아름다운 불륜'이니 하며 스스로 당당하지 못한 측면을 인정하여 골머리를 썩지 않는다. 오늘의 개인은 공동체의 질서를 인정하고 지키려 함에도,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사랑의 열병에 스스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노라고 내숭을 떤다.

결혼이란 제도에 의해 고형화 되고 박제화 되어 있던 사랑이란 감정이 전율처럼 온 몸에 퍼지는 것을 누군들 저항할 수 있었겠느냐며 너스레를 떤다. 자신이 부도덕해서라기보다는 내 안의 또 다른 사랑이 눈을 뜬 걸 어떡해? 이거나, 한 번쯤은 그럴 수 있지 않겠어? 이런 식이다.

오늘의 주인공 혹은 드라마는 윤리적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시청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나 애인 한 명쯤은 있는 것 아니겠어 혹은 있을 수도 있지 하는 시대적 수용의 맥락 위에서, 결혼이란 제도를 유지할 것이냐, 즉 가정이란 울타리를 존속시킬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불륜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불륜에 대한 다툼은 해묵은 논쟁거리 밖에 되지 못한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SBS의 <내 남자의 여자>도 그렇고, MBC의 일일극 <나쁜 여자 착한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불륜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계속 배우자와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만이 중요하다.

<애인>에서의 불륜은 오늘의 드라마로 보면 정말이지 아름답기까지 하다. 십 수 년이 가까운 세월을 다른 여자를 사랑하며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이중생활을 한 송건우(이재룡 분)와 윤서경(성현아 분)의 행태는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다. 그것도 모르고, 알고 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세경(최진실 분)과 태현(전노민 분)의 사랑도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어딘지 병적이다.

서로 모두에게 이미 병적인 사랑을(태현에게 집착하며 복수극의 대리인처럼 등장하는 소영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정해놓고 그들 사이에 놓인 일상의 갈등만을 카메라는 쫓는다. 제 엄마가 아닌 계모에게 키워지는 건우의 딸이나 제 핏줄도 모른 채 태현에게 키워지는 아들에게 가해진 운명은 사랑이니 하는 감정의 변덕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무책임한 어른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다.

무섭게 돌변한 은수(배종옥 분)의 보복이, 혹은 화해가 어떻게 그려질지 알 수 없지만 <내 남자의 여자> 역시 불륜이라는 윤리적 문제보다는 결혼 생활의 존속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람기 많은 남편을 둔 언니(하유미 분)의 충고나 남편의 짐을 싸 보내고 고독의 밤을 보낸 은수가 언니에게 "왜 알게 했어, 왜 화영(김희애 분)이는 건드려서 이 지경까지 만들었어?"하고 독 오른 푸념을 하는 것에서 그녀의 더 중요한 관심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이 없다면 죄의식은 있어야 한다

ⓒ sbs.co.kr
세태가 변하여 가벼운 불륜쯤은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일까. 한 번쯤의 일탈은 용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갈등할 필요도 긴장의 날들을 살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을 사랑해 줄 것이란 헛된 망상을 깨달아 버린 우리들이라고 생각하자니, 우리 아이들보기가 너무 부끄럽다.

드라마는 아름다운 시어들이 죽고 영혼을 두드리는 소리와 인상들이 무가치해진 팍팍한 세상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랑이란 정신적 행위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되지 못한다. 결혼이란 제도에 대한 집착은 물질적 생활과 사회적 유대에 천착하는 오늘의 세태를 반영한다. 사랑을 선택한 불편과 갈등보다 결혼 유지의 결과로 얻어지는 안정이 최소한 덜 불안하다.

'극적'이란 낱말을 생명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평이하고 순조로운 결혼생활과 그들 사이의 사랑을 그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한 때, 배신이란 주제가 극의 긴장과 시청자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이 대표적 드라마 일 것이다. 물론 그 주제는 여전히 우리 드라마의 단골 메뉴다.

얼마 전 종영된 <사랑하는 사람아>나 방영 중인 <케세라 세라>에서도 출세와 성취의 야망을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헌신짝 차듯이 하였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윤리적인 갈등과 번민이 있다. <내 남자의 여자>에, <나쁜 여자 착한 여자> 어디에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며 헌신하는 배우자에 대한 갈등과 속죄가 있나? 전혀 없다. 다만 욕망에 사로잡힌 병든 영혼과 집착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병든 줄 모르는 어리석은 환자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없다. 불륜은 있으나 함께 꼭 있어야할 죄의식은 없다. 공허할지언정 사회적 지탄도 듣기 어렵다. 연일 뉴스에서는 성범죄와 그것을 가볍게 바라보는 우리의 윤리의식에 대한 성찰을 주문하면서 사랑도 없는 허깨비 가정을 광고하듯 그려낸다. 불륜에 의해 깨어진 가정과 세대의 여파는 성범죄 못지않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다. 사랑은 없다 해도 최소한 죄의식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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