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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색 물빛을 바라보며
옥색 물빛을 바라보며 ⓒ 김대갑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는 그 달을 쳐다보며 필시 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다. 보름달처럼 둥그런 아내의 얼굴, 반달처럼 어여쁜 딸의 얼굴, 초생 달처럼 이울어져 가는 노모의 얼굴.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으며 한숨을 지었겠지. 언제쯤 이 지겨운 군역이 끝나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기 아래에 보이는 축산마을에선 가족들이 둘러 앉아 정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데, 어이하여 나는 여기 외롭게 봉수대를 지키고 있을까?

그러나 잠시간의 회한을 가진 그는 다시 달을 쳐다보며 작은 결심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있어 적들의 침입을 나라님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은가. 힘을 내자. 다시 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봉수병이 이곳에서 왜구의 동태를 감시할 것이고, 그 덕분에 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존재는 보잘 것 없지만 봉수대는 수백 년의 세월 후에도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병사는 동경처럼 자신의 얼굴을 반사하는 만월 앞에서 이런 결심을 하며 두툼한 주먹을 꼭 쥐었을 것이다.

최첨단 통신탑과 함께
최첨단 통신탑과 함께 ⓒ 김대갑
봉수대는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의 지형에 맞게 설치한 최첨단의 통신수단이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 때 체계적으로 정비된 봉수대는 조선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군사통신방법으로써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종의 4군 6진 정책에 의해 군사적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봉수대는 전국에 약 675개소가 설치되었다. 봉수대는 주로 북쪽의 국경과 경상·전라도에 많이 있었으며 특히 해안 지역에 많이 배치되었다.

경북 울진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군으로 내려가다가 영해사거리에서 축산항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12번 군도가 나타난다. 12번 군도는 대게로 유명한 강구항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해안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해발 282m의 대소산을 만나게 된다. 대소산은 영해면 괴시리와 사진리의 경계에 있는 산맥의 한 봉우리인데, 이 대소산의 정상에는 조선 초기의 봉수대 하나가 인터넷 통신 탑과 나란히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 봉수대는 바로 대소산 봉수대로써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의 방어벽
이중의 방어벽 ⓒ 김대갑
봉수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트인 산꼭대기에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봉수대가 대대적으로 확립된 이유는 당시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유교이데올로기를 통치기반으로 하는 조선 왕실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교통과 통신체제의 효율적 운용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육지에서는 역원제를, 해상에서는 조운제를 실시하였고, 국방상의 필요에 의해 봉수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대소산 봉수대는 이런 국방상의 의무를 충실히 하는 통신수단이었다. 영덕과 축산 방면의 동태를 정찰하던 곳이자 왜구의 침입을 중앙에 알리는 정보기지였던 것이다. 대소산 봉수대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걸쳐 있는 다른 봉수대를 거쳐 서울의 중앙 봉수대에 자신의 정찰 임무를 매일 보고했다. 낮에는 연기로써, 밤에는 봉화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렸으며, 만일 연기나 불을 피울 상황이 안 되면 화포나 각성 또는 기로써 정찰 임무를 알리기도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봉수병이 직접 다른 봉수대로 뛰어가기도 했다. 그만큼 봉수대의 전술적 가치는 중요했던 것이다.

소박한 원추형의 봉돈
소박한 원추형의 봉돈 ⓒ 김대갑
만일 어떤 지역의 조망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필히 봉수대를 찾아 가는 것이 좋다. 대소산 봉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봉수대에 오르면 앞서 말한 12번 해안도로가 한 눈에 들어오며 현재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대소산 봉수대에서는 영덕군의 풍력 발전소가 한 눈에 들어와서 이국적인 정서를 톡톡히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세 개의 날개를 휘날리며 집단적으로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비취빛으로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시원스레 펼쳐진 축산항의 모습도 장관이요, 아주 멀리서 어서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돌아가는 풍차의 모습도 장쾌하다. 그래서 봉수대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인 것이다.

대소산 봉수대의 총 면적은 약 850평 정도이며, 산의 중심부에 원형의 방어벽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 견고한 방어벽 안에 지름 11m, 높이 2.5m의 봉돈이 원추모양으로 아담하게 설치되어 있다. 원기둥 모양의 연조가 나란히 있는 다른 봉수대와는 달리 대소산 봉수대는 나지막한 봉돈 하나가 덜렁 있어 다소 썰렁한 느낌도 준다. 봉돈 위에서 바로 나무에 불을 붙여 봉화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예전에 봉화를 올릴 때 짐승의 똥을 함께 태워 연기가 많이 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늑대의 똥을 넣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개나 너구리의 똥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스라이 보이는 풍차들
아스라이 보이는 풍차들 ⓒ 김대갑
발아래 펼쳐진 시원한 정경과 바다의 기운을 품은 향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대소산 봉수대. 흔히 영덕군은 대게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종 문화재와 유적, 설화도 유명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영덕 대게도 이제는 옛날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대게도 잘 잡히지 않을뿐더러, 각종 수입산 대게가 넘쳐나서 원조 영덕대게는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영덕군에 남아 있는 조상들의 숨결과 동해의 푸른빛은 계속 감상할 수 있으니, 여전히 영덕은 동해의 명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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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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