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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훈, 'Made in Man'
ⓒ 컬처뉴스
"전쟁과 폭력을 다룬 사진은 '선택된 표면'만을 드러낼 뿐 그 내면까지 담고 있지 않다. 내면까지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대포장이자 작가의 오만이다. 사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어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표면 뒤에 숨은 내면은 뭐냐고 묻고, 죽은 자의 모습을 통해 죽인 자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전.쟁.표.면.'(5월 2일~31일, 평화박물관)을 기획한 노순택 작가의 말이다. 한데 어우러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네 곳의 공간과 이미 지나가 버린 네 번의 시간을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모은 이번 전시에는 성남훈, 이상엽, 이성은, 노순택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네 명의 사진가가 참여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뿐 아니라 박평종 미학자의 전시총론 '속죄와 윤리', 한홍구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상임이사의 여는 글과 더불어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남훈), 문건영 변호사(이상엽), 노용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이성은), 김태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큐레이터(노순택)의 사진글이 함께 전시되어 폭력의 역사를 좀 더 밀도 있게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동구 내전 지역에 오랜시간 시선을 고정시켜 온 성남훈이 보스니아 내전을 기록한 'Made in Man'과 지금은 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지만 고대 끊임없는 전쟁으로 언제나 폐허의 모습만을 보여줬을 실크로드를 담은 이상엽의 '고대 전쟁의 흔적, 생태 혹은 문명 사이에서'가 전시되어 있다.

▲ 이상엽, '고대 전쟁의 흔적, 생태 혹은 문명 사이에서'
ⓒ 컬처뉴스
성남훈의 작품은 이미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도시의 공간들을 보여준다. 철조망 사이로 드러난,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건물과 폭격과 총격으로 초토화된 거리의 구멍 난 차들이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전성원 편집장은 "성남훈의 사진이 연출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 모든 전쟁과 살육, 학살과 강간, 빈곤과 기아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묻고는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고 말한 아도르노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이상엽의 작품은 그저 풍광 좋은 관광지의 사진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사진 밑에 작가가 적어놓은 '전쟁이 인간의 폭력 본성 때문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전쟁의 칼소리도 비명소리도 모두 사막의 모래바람에 실여 사라졌다 무엇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 등의 문구는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 저 공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살육이 벌어졌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작가가 작가노트에 적었듯 '고대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사진으로 담기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처럼 파괴될 당시의 매케한 연기도 침략자의 칼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도 고원을 스쳐가는 바람에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너무 오래돼 기억하기도 힘든 흔적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 이성은, '경산 코발트 폐광 대원골 유해 발굴 현장'
ⓒ 컬처뉴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레드 콤플렉스'로 지금껏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민간인 학살을 조명한 이성은의 '경산 코발트 폐광 대원골 유해 발굴 현장'과 5ㆍ18민주항쟁 희생자들의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 '망각 기계'를 만날 수 있다.

이성은의 작품에는 한국전쟁 동안 경남 경산에서 공산군에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무고하게 학살당한 양민들의 유해 발굴 현장이 담겨져 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움조차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부패되어 앙상한 뼈만 남은 그들은 지난 세기의 범죄를 증언하고 있다.

노용석 조사관에 따르면 현재 대원골 A와 B지점은 골프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얼마 전 경산 코발트 광산 현장에 가서 우리가 발굴했던 대원골 지점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골프장 쪽을 바라본 적이 있다. 기억할 수도 없고, 지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라고 말한 노용석 조사관의 말이 가슴을 뜨끔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노순택은 5ㆍ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들의 가묘 앞에 놓여 있는 영정사진에 앵글을 맞추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은 영정사진들은 꼭 부패한 사람의 얼굴처럼 이곳 저곳이 일그러져 있다.

▲ 노순택 작
ⓒ 컬처뉴스
영정사진 밑에는 '좌경부 총상', '내부장기 출혈' 등 듣기에도 끔찍한 사인이 밝혀져 있다. 그 중에는 부패로 인한 사인규명 불능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있다. 노순택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오월에 죽은 이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얼굴로 전달해 줄 따름이다. 오랜 세월에 녹아버린 그의 얼굴을 담은, 사진의 몫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누구의 몫인가"라고 질문한다.

박평종 미학자는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똑같은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폭력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면서 "그 배움의 실천의 한 형태가 폭력의 흔적을 더듬고 찾아내어 의식의 수면으로 띄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워져 있다'는 바로 그것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폭력과 살육을 보여준 이번 전시는 속죄를 향한 힘겨운 발걸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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