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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 이맘때에도 봄볕은 여전히 화사하고 산천에는 온갖 꽃무리가 제 빛깔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었을까?

1917년 음력 4월. 여느 봄날처럼 한 쌍의 청춘 남녀가 초례청에 서서 백년가약을 맺고 있었으니 신랑은 열아홉 살의 방정환님이셨고 신부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 용화님이셨다.

1989년에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소년입지회"를 세우고, 환등기를 매개로 이웃 어린이들에게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놓곤 하던 방정환님이 지난한 세월을 뒤로하고 이 나라 어린이 운동의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는 여러 조건이 비로소 마련된 시점이 이때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3.1운동의 전야였던 만큼 당장은 어린이 운동보다는 비밀결사체를 중심으로 한 청년 운동과 기미독립만세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선독립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는 일이 급선무였으리라.

신혼의 단꿈도 잠시, 일경에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그렇게 3.1운동 시기를 격정적으로 보내다 스물두 살 방정환님은 1920년 일제 관헌의 등쌀을 피하여 동경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부 회장직을 맡으며 동경과 서울 사이를 이어 직접 소년 운동에 진력하게 된다.

"불 켜는 아이들"이라는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가 "개벽"지 3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며 '어린이'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하게 하였던 것도 그해 8월부터이다.

그렇게 10년 남짓의 세월 어린이의 큰 벗 소파 방정환 선생이 계셨다.

"개벽"지를 통해 불령파리(일제에 저항하는 곤충 파리를 뜻한다) 은파리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통렬히 풍자하고 10년 후의 조선을 기약하자며 5월을 어린이의 달이라 짓고 행진하던 선생. 어린이를 통하여 조선의 미래를 도모하자는 긴 호흡을 지니시고도, 민족의 현실 앞에 애끓는 조바심으로 10년을 하루같이 치열하게 살아 백년대계를 그 10여년의 세월 속에 오롯이 담아낸 선생의 일생.

자신을 '불령선인'이라며 일제에 맞섰고, '어린이'라는 당시로서는 용어조차 생소한 잡지로 역사의 새장을 열어 온갖 이야기를 토해 내시던 소파 방정환. 그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어린이 운동은, 단지 아이들 사랑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식민치하의 암울한 민족적 현실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그는 당시의 핍박 받는 아이들을 바로 받들고 그들을 곧추 세워, 어린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랬다. 선생의 오랜 벗 유광열이 기억하기를 소파 방정환 선생께서는 "10대의 소년을 잘 기르면 10년 후에는 그들이 씩씩한 20대의 청년이 될 것이요, 그들이 또 10년을 자라면 30대의 장년으로 이 사회를 지도하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10년 후를 내다보자'는 표어를 내걸고 그 운동을 일으키겠다고 하였다는 증언을 한다.

어린이 운동과 교육이 백년대계라고는 하지만 백년후의 일을 생각하자는 표어를 내걸기에는 한시가 바쁘다며 초조해 보였다는 것이다.

방정환 선생은 생전에 호이자 대표적인 필명인 소파를 비롯하여 잔물, 북극성, 몽견초 삼산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필명(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9개에 달함)으로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방대한 작품에 미루어 보면 한 사람의 몸으로 수십 명, 어쩌면 수백 명 분량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것이 결국 남은 인생을 앞당겨서 소진해버린 결과 1931년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안타까운 이유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가 소망했던 어린이와 그의 신념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남 전 색동회 회장이 전하는 소파라는 호의 뜻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방정환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 부인의 손을 붙들고 "부인 내 호가 왜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터이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진보적 휴머니스트 소파 방정환 선생. 그의 족적은 비단 "어린이"지 등을 통한 어린이 운동에서뿐만 아니라 "개벽" "신여성" "혜성" 등의 지면을 통하여 광범한 민족 독립운동과 사회비판으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녹성"이라는 영화잡지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이를 온전히 사랑했던 사람. 어른의 소유물이 아닌 어린이로, 제 빛깔로, 크기로 자라나 새 세상을 열어주길 바랐기에 분재를 키우듯 의도된 교육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담아 사랑의 선물을 주고 간 사람. 방정환.

소파 방정환 선생 앞에서 필자는 그의 글을 읽으며 아직도 어린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눈물도 가짜"라는 은파리의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이의 죽음과 부자의 죽음을 비교하며 부자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온 동네 사람들이 가짜 눈물을 흘리지만 가난한 이의 죽음 앞에서는 부정한 것을 본 양 그 죽음이 폄훼되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난한 죽음)는 거짓말이라도 해서 돈 모을 줄은 모르고 다만 너희 먹을 것을 위해 전답만 팠다. 너희가 따뜻이 잘 집을 짓느라고 땅만 다졌다. 너희가 병만 나면 입원하기 위해 병원만 지었다. 너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높다란 전신주 끝에 전선만 맸다. 최후의 시각까지 너희를 위해서 일하다가 부상당해 죽었다. 그 공로에 대한 보수가 침뿐이냐 부정뿐이냐. 아아 뻔뻔한 놈은 사람들이다. 놈들은 그래도 자신이 조금만 불편하면 정의니 인도니 하며 떠든다."

덧붙이는 글 | 오명록 기자는 한국방정환재단 사무총장입니다.


#방정환#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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