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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블레어 총리의 사임발표 회견을 머릿기사로 다루고 있는 <가디언> 인터넷판.

"6월 27일 나의 사직서를 여왕에게 제출하겠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10일 자신의 지역구인 더램시의 세지필드에서 자신의 사임 발표 연설을 했다. 1983년 불과 30세의 나이로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그가 이제는 총리로 돌아와 사임 발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블레어는 "나는 이 나라의 총리로서 10년간 일해왔다, 이 기간은 나에게 충분이 길었고, 특별히 이 나라 국민들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가 "더욱 많은 일자리, 더 적은 실업자, 개선된 보건과 교육의 결과, 줄어든 범죄율, 매분기 경제 성장 등 1945년 이후에 이런 업적을 이룬 정부는 바로 이 정부 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방청객은 박수로 환호했다.

그러나 그는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도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행했다"며 자신의 실수 가능성을 열어놨다.

그리고는 "나의 총리직 수행에 대해 분명히 심판이 있을 것이다"며 "결국에는 바로 당신, 국민들이 심판하실 것"이라며 역사의 심판을 달게 받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년 전 그는 '제3의 길' 위에 뜬 새별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 AP/연합뉴스
이제 토니 블레어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좌와 우를 뛰어넘는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세계의 화려한 주목을 받아온 토니 블레어. 그가 지난 10년간 영국을 이끌며 남긴 '빛과 그림자'는 무엇인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조심스럽게 그를 평가해보자.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총리에 입각할 당시 그는 영국 정치의 새로운 별이었다. 43년의 젊은 나이에 화려한 연설과 뛰어난 임기응변, 유머는 그를 인기 정치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복지·교육·의료·범죄·외교 등 각종 정책을 자신있게 피력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관련된 숫자와 지표를 줄줄 외곤 했다. 집권 초기 60~70%대의 높은 인기도는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세 번이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인기를 한몸으로 받아온 그였지만, 그의 이름은 빛이 바랜 지 이미 오래다.

지난 4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은 사상 유례없는 패배를 당했다.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노동당을 제치고 제1당으로 부상한 것.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도 기존의 수많은 의석을 보수당에게 넘겨줘야 했다.

[빛] 실업 줄고 의료·교육 집중 공략... '반 빈곤정책' 눈길

그의 '빛'은 무엇인가. '제3의 길'의 산파 역할을 한 안토니 기든스가 지난 3일 영국 요크대학에서 특별 강연을 했다. 세계적인 석학답게 그의 강연은 쉽고, 명쾌했다. 그의 의견을 바탕으로 지난 10년을 살펴보자.

기든스는 경제·공공부분(특히 보건과 교육)·빈곤율·분권화(북아일랜드의 평화정착,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부분 자치 허용) 등 객관적인 지표와 사건들을 종합했을 때, 분명 10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주장했다.

사실 경제 침체 등으로 허덕이던 영국은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로 인해 실업률이 4%대 수준으로 눈에 띄게 줄었고, 일자리가 창출은 세수의 증대로 이어졌다. 노동당은 늘어난 세금을 가지고 공공 부분, 그중에서 특히 의료·교육·빈곤 척결 등을 정책의 우선과제로 선정해 이를 집중 공략했다.

이를 위해 각 정책마다 세부 목표치를 정하고, 이를 예산 등과 연계해서 이를 달성하도록 각종 정책을 적극적으로 감시 및 평가했다. 그 결과, 보건과 교육 분야가 과거보다 발전했다. 물론 이 분야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질적인 문제인 병원 대기시간 감소 등의 실적을 이뤄냈다.

또 '반 빈곤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빈곤에 취약한 노인·장애인 등 연금생활자와 어린이 등에게 세금 공제와 급여 수당을 늘리는 등의 정책을 통해 노동당 집권 후 700만명의 어린이가 빈곤에서 탈출하는 등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침체됐던 영국이 블레어 정부를 통해 다시 도약하게 된 것. 주간 <옵저버>는 사설에서 "블레어가 10년을 집권한 후에 영국이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졌다"고 호평했다.

기든스의 주장처럼 분명 영국 정부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지표에서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왜 블레어는 이제 더 이상 'TV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전락한 것일까.

잘못된 만남? 지난 2004년 서방선진8개국정상회의를 주최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그림자] 치명적인 이라크 개입, '국익'이라는 양날의 칼

기든스는 이번 강연에서 스스로 노동당에 깊이 연관된 사람이라서 그런지, 블레어를 직접 비난하지는 않았다. 대신, 차기 총리가 확실시되는 고든 브라운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제시, 블레어의 과오를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노동당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①이라크 전쟁 ②실추된 신뢰 ③노동당의 지나친 익숙함을 꼽았다.

이라크 전쟁은 노동당의 인기를 곤두박칠치게 만든 결정적인 변수임에 틀림없다. 이라크 개입 이후 계속 불거져 나온 미국 정부의 수많은 거짓 선전에 블레어가 깊이 개입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는 끝까지 부시와의 친분을 과시했고, "이라크전 개입은 우리 영국의 '국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로 인해, 블레어는 '거짓말쟁이' '정신이상자'라는 언론의 악평을 듣게 되었고, 결국 토니 블레어의 정치 생명은 이라크전을 통해 확실한 하향 곡선을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이를 '영국의 국익'을 위한 최대한의 선택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한 살인, 만행도 합리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지나치게 현실적인 명석함(?)이 약소국에게는 언제든 '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든스가 두 번째로 지적한 '신뢰'의 문제를 살펴보자. 기든스는 아무리 좋은 객관적인 지표를 영국 국민들에게 보여줘도 이를 믿지 않을 정도로 노동당의 신뢰가 실추되었다고 개탄했다.

왜 그럴까. 이라크전에서 잃은 신뢰와 함께, 혹자는 블레어의 화려한 언변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가디언>과 <인더펜던트> 등은 한 목소리로 블레어가 항상 공공부분 등의 개혁 등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기대 수준을 잔뜩 부풀려 놓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제공받는 서비스의 개선이 있더라도, 일반 대중들의 기대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것. 화려한 언술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정통 노동당' 지지자에게 블레어는 '배신자'

▲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이 지난 2005년 아프리카의 빈곤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국제적 공조의 필요성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 WEF
기든스가 세번째로 꼽은 지나친 친숙함의 문제를 살펴보자. 10년 동안이나 노동당이 집권을 하면서 일반 국민들은 토니 블레어라는 인물에게 어느 정도 식상해 있는 상태다. 토니 블레어와 노동당에 대한 익숙함이 오히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

기든스는 "노동당이 '이데올로기' 정책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당의 전통적인 가치인 '사회적 정의'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를 이슈화할 만한 정치적 수사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블레어 정부가 반 빈곤정책 등을 통해서 개선을 이뤄냈지만, 시장을 최우선시하고 시장을 근간으로 한 시스템과 작동원리로 일관해 시장 최우선주의인 보수당 정부와 사실상 똑같다는 지적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요크에 살고 있는 린다(56)는 "노동당과 보수당의 정책적 차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불평등 해소를 주장하는 '정통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블레어는 '배신자'인 셈이다.

실제 영국은 가난에서 탈출하는 사람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 완화 등으로 인해서 최상층 사람들의 소득은 너무 급격하게 느는 반면에 하층 사람들의 소득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해 사회 전반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상화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고착화되는 계급 등으로 인해 하층 사람들에게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든스가 앞으로 노동당 정부가 불평등 해소 등 더욱 사회민주적인 가치를 수용, 정책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라크전에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최근 지방선거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토니 블레어에 대한 영국 언론과 시민들의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가 이라크 전에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가 이룩한 성과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너무 이른 호평이 아닐까.

경제 성장의 이면에 있는 냉정한 시장논리. 철저히 이로 무장된 사회 전반의 시스템. 그로 인한 부작용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 것이기 때문이다. 대처 집권 이후 극심해진 불평등과 치솟는 물가는 서민들의 숨통을 더욱 조여오지 않았는가.

태그:#토니 블레어, #노동당, #이라크,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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