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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자들의 문, 인천공항
떠나는 자들의 문, 인천공항 ⓒ 제정길
그래서 어느 날 그냥 눈 딱 감고, 훌쩍 길을 떠나버리기로 작정을 한 데는 그러한 이유도 있을 터였다. 그래 가보는 거다. 훌훌 털고 가보는 거다. 여기서 잃을 게 더 무엇이 있을라구.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니까 그냥 떠나보는 거지 뭐….

지난달 25일 이른 저녁에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꼬박 10시간을 날아서 같은 날 정오에 샌프란시스코라는 위치에 나를 옮겨 놓았다. 서울에서 졌던 해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직 중천이었고 그 해를 따라 다시 두시간여 땅 위를 움직이니 일차 기착지인 새크라멘토에 닿을 수가 있었다.

지구 둘레의 5분지 1쯤에 달하는 10000km 가까운 거리를 땅으로, 하늘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삼 거리의 위대함을 실감해야 했다. 위치의 또 다른 이동 비용은 시간이라는 놈과 그리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참아야하는 불편함이 숨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한적한 교외를 연상시키는 새크라멘토 주택가
한적한 교외를 연상시키는 새크라멘토 주택가 ⓒ 제정길
새크라멘토는 더웠다.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라는 새크라멘토는, 복작거리는 서울 살이에 익숙한 나에게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거리는 크고 집들도 크고 나무도 크고 사람들도 컸다. 그러나 그것들은 도심의 서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고 제 각기 널찍히 떨어져 위치하여 여유로워 보였다.

나의 새 위치, 마당가의 풀장
나의 새 위치, 마당가의 풀장 ⓒ 제정길
널찍한 집에 여장을 풀고 널찍한 풀장가에 차린 식탁에서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찬을 향유하였다. 36년 전 이민 온 조카의 환대는 따스하였고 또한 여유로웠다. 두어달 간 이 곳이 나의 위치고 나의 아지트가 될터인 셈이다. 잘 지내보자, 새 위치야!

그랜드캐니언을 보기 위해 1300km를 달려가다

길을 떠나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 메르세데스
길을 떠나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 메르세데스 ⓒ 제정길
며칠을 빈둥거리면서 새 위치에서 보낸 뒤 또 길을 떠나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랜드캐니언까지 1300km, 왕복 2600km를 차로 달려 보기로 한 것이다.

4월 29일, 길을 떠나는 날의 아침은 맑았다. 이곳의 기후는 아침이면 상당히 쌀쌀하고 낮이 되면 한여름처럼 더웠다. 서늘하고 상쾌하고 오염없는 사월의 아침에 최신, 최고급 모델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길을 떠나는 맛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잘 사는 조카를 둔 덕에 팔자에 없는 호강을 누리는 셈이었다. 그가 맨손으로 이 땅에 와서 이 위치에 오르기 까지 엄청난 고생을 할 때 아무것도 못 해준 주제에 이제 와서 그 호사에 슬쩍 끼어드는 게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말 그대로 눈 딱 감고 모른체 하기로 했다(사람이 백수가 되면 체면이 없어지는 모양이다. 큭큭).

차들이 뜸한 5번 프리웨이
차들이 뜸한 5번 프리웨이 ⓒ 제정길
새크라멘토를 벗어나서 5번 프리웨이로 들어서자 차들은 바람처럼 달렸다. 넓은 길에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차들은 자주 보이지 않았고 차길 너머서도 눈길이 미치는 곳에 인가 하나 없었다. 평야가 끝나는 지점에 낮은 구릉이 제주의 오름을 닮아 엎드려 있었다.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제주의 오름을 닮은 구릉들, 시속 120km 달리는 차속에서 찍은 것이라 선명치가 못하다
제주의 오름을 닮은 구릉들, 시속 120km 달리는 차속에서 찍은 것이라 선명치가 못하다 ⓒ 제정길
도로변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오렌지 나무며 포도나무며 각종 과수들이 열병식하듯 까마득히 도열해 있다. 그것들은 마치 FTA를 위해 진군 나팔을 기다리는 거대한 군사조직처럼 보였다. 농장이 끝나면 목장이 나타나고 목장이 끝나면 또 농장이 나타났다.

쉬지 않고 5시간쯤을 내쳐 달렸던가. 오전 7시 30분에 새크라멘토를 출발한 것이 오후 1시가 되어갔다. 배도 고파오고 운전도 교대할겸 식당을 찾아 프리웨이를 벗어났다. 이상하게 미국의 도로에는 프리웨이건 하이웨이간에 휴게소가 거의 없었다. 기름을 넣거나 밥 한 끼라도 먹을려면 인근 도시로 찾아들어가야 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도시에 들어가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끝없이 펼쳐진 농장들
끝없이 펼쳐진 농장들 ⓒ 제정길
5시간 30분을 줄곧 운전한 조카는 크게 지치지도 않는지 더 할 수 있다며 '씩' 웃는다. 미국이 땅덩어리가 큰 줄은 알지만 서울-부산보다 더 먼거리를 논스톱으로 그냥 달려오다니…. 한국식 사고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당은 아담하고 친절했다. 티본 스테이크와 치킨 살라드는 맛이 괜찮았다. 미국에 와서 고기맛은 실컷 보는 셈이었다. 원님덕에 나팔 분다고 덕분에 입이 호사를 누리었다.

오후2시에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평생 처음으로 세칭 말하는 벤츠를 몰아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2007년형 s550을. 작은 흥분이 전신을 타 내렸다. 차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후진할 때는 네비게이터에 화면이 비치고 다른 차가 지나치게 근접하면 경보음이 울리는게 운전하기에도 편리하였다. 58번 프리웨이로 들어서자 차는 낮게 그릉거리며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표범처럼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제한 시속이 70mile(112km)이니 80mile(128km)까지는 달려도 된다는데 달리다 보면 어느새 150~160km를 육박하고 있었다.

황량한 모하비 사막
황량한 모하비 사막 ⓒ 제정길
도로변의 풍경도 바뀌어 가시나무만 짬짬이 서 있는 사막이 나타났다. 모하비 사막이었다. 사막은 가도 가도 계속 되었다. 황량한 사막 위를 진입로도 진출로도 없는 외줄기 길을 차는 유성처럼 달렸다.

달리다 보면 금세 160km를 넘나들어 자주 계기판을 보며 속도를 줄여야 했다. 속도는 중독된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아슬아슬 했던 것이 점차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고 마지막에는 아늑하기까지 하였다.

새크라멘토를 출발한 지 8시간이 넘어서야 근근히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아리조나 주에 진입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 안에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하기는 무리라 중간에 자고 가기로 하였다.

이미 해도 뉘엿 뉘엿 저물어 황량하고 쓸쓸한 서부의 분위가 물씬 배어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말을 타고 총을 손에든 사나이가 표표히 나타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사막속의 고독한 도시 킹맨에 해 지다.
사막속의 고독한 도시 킹맨에 해 지다. ⓒ 제정길
킹맨이라는 도시로 빠져나왔다. 허허 벌판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도시, 거대하나 을씨년스러웠다. 숙소를 정하고 식당을 찾아나서니 해 아주 붉게 천천히 지고 있었다. 오후 7시를 넘어섰다.

길을 떠난 지 11시간 30분 만이었고 주파한 거리는 1100km를 조금 넘었다. 서울-부산을 한 번 반 왕복한 거리였다. 새우와 닭고기와 스테이크를 섞어주는 스페인 요리를 시키고 와인 한 잔을 먹고 기다리는데 졸렸다. 내게는 다섯 시간의 무정차 운전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위치 이동은 여전히 어눌하였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익숙해지고 이윽고는 지루하게 까지도 되겠지만 위치와 위치 사이에는 길이 있고 그길을 나는 오늘 하루도 마냥 달렸다.

덧붙이는 글 | 2편에서 계속됩니다.


#미국#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그랜드캐년#프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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