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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 동네 동구리는 어른들 말을 빌자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일벌레로 소문났던 엄마는 내 나이 7살에 돌아가셨고, 그런 엄마만 믿고 일은 뒷전이었던 아버지는 늘 동네아저씨들과 화투 치고 술만 드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이전보다도 더 술을 드셨고, 술 취한 저녁이면 늘 할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에게 술주정을 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밭뙈기 하나 있는 걸 일구셔서 우리네 생계를 책임지셨는데, 할머니 혼자 힘으로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에 역부족인 건 당연했다. 쌀밥이란 건 구경도 못해봤다. 어쩌다 아버지 생신엔 그래도 꽁보리밥 한 쪽에 쌀을 올려서 밥을 지은 후 아버지에게만 쌀밥 한 그릇을 주시곤 했었다.
나와 동생은 보리밥 한쪽에 붙은 쌀밥 몇 톨을 서로 달라고 할머니를 보채곤 했다. 할머니는 쌀과 보리를 살 돈이 없어서 텃밭에서 뽑은 배추나 집에서 기른 콩나물로 된장국을 끓인 후 보리밥을 그 국에다가 넣은 후 푹 삶아서 '배추죽'이라고 우리에게 주셨다. 늘 배가 고팠던 그때는 그 죽이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해주었고 맛도 달달했다.
그 때 먹었던 생쌀의 추억
그 배고팠던 시절, 친구들과 나는 가끔 생쌀을 훔쳐서 먹곤 했다. 친구들 집이야 쌀 걱정하는 집이 없었기에 다행히도 친구를 꼬여내어 편지봉투에 쌀을 가득 담아오게 한 후 그걸 날로 씹어먹었던 것이다.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맛이 은근히 고소하면서도 꿀맛이다.
특히나 먹을 것이 없었던 그 때는 피비도 뽑아 먹었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소나무 속살이 나오는데 그걸 낫으로 벗겨서 씹으면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났다. 간식거리들은 그렇게 들에 산에 지천으로 널려있었지만 그래도 쌀밥을 원 없이 먹고 싶었던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거리는 생쌀이었다.
어느 날 친구 남순이를 꼬드겨서 쌀을 편지봉투에 담아오게 한 후 학교에 들고 가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가려면 꼬불꼬불한 산길을 2시간을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 산중턱에 앉아서 도시락을 반 정도 까먹고, 수업 쉬는 시간에 도시락 반 남은 걸 또 까먹으면 정작 점심시간엔 쫄쫄 굶기 일쑤였다.
지금 같으면 도시락 두 개를 싸가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가난했던 그 시절엔 도시락 한 개 싸기도 버거웠고 도시락 반찬은 늘 김치와 장아찌가 전부였다. 그날은 생쌀이 있었기에 도시락은 먹지 않고 산 중턱에 앉아 생쌀을 씹어 먹으면서 왔다.
그 날 우리는 생쌀을 3분의 1정도 먹은 후 다시 가방에 넣고 학교로 향했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2교시 수학공부를 하는데 배가 고팠다. 남순이와 나는 눈짓을 주고받은 후 가방에 있던 쌀을 꺼내 조심스레 책상 밑으로 내린 후 조금씩 손에 부어서 먹기 시작했다. 아, 그 맛을 누가 알랴. 요리를 잘한다는 천하의 장금이도 그 맛은 흉내낼 수 없으리라.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를 하실 때마다 우린 쌀을 먹었고 선생님이 돌아서면 언제 쌀을 먹었느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 몰래 쌀을 책상 밑으로 내려서 먹으려니 쌀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흘린 거야 표시가 잘 안 나니 문제가 되질 않았는데 아뿔싸!
쌀을 손에 붓다가 쌀을 넣었던 봉투가 잘못해서 뒤집어졌고 쌀이 한꺼번에 교실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 소리에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셨고 교실 바닥에 흩어진 하얀 쌀을 보시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니? 쌀을 왜 가지고 다니니?"
나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도시에서 전근을 오신 선생님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셨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배고파서… 먹으려고 싸 왔어요…" 했다.
창피했지만, 쌀 버리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생님은 기가 막혀 하셨고 나는 창피해서 남순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가스나가 딴 곳만 쳐다보고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그 수업시간이 끝나고 쌀을 주워 담느라 창피하고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그 쌀을 먹지 못하고 버린다는 것이 더 마음 아팠다. 내 친구 남순이랑은 지금도 그 이야길 하며 배꼽 빠지게 웃다가 울다가 하곤 한다.
어려서 생쌀을 많이 먹어서였을까? 아이 둘을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했던 난 꼭 생쌀을 바가지에 담아먹곤 했다. 그런 나를 남편은 무슨 원시인 보듯 했지만 나는 그렇게 내 아프고 행복한 추억을 씹고 또 씹어 먹었다.
그 맛있던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요즘, 오히려 그 먹기 싫던 보리밥을 더 비싼 돈 주고 사먹어야 하는 시절이 된 게 우습다. 하지만 그 보리밥이 우리 건강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난 그래도 아직까지 쌀밥이 좋은 걸 보니 기억 속 어딘가가 아직도 허기가 져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