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남녀의 결합으로 존속되는 한 남자에게 여자는 가장 난해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거의 대부분의 남녀가 짝을 맺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 많은 문학에서 갈구한 완벽한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이 아니라고 모두를 포기할 순 없다. 완벽이 최선이라면 인류를 구원한 변명은 차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나 남자는 아무리 여성학을 공부해도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커진 물음표로 변해감을...그렇게 어렵기만 한 여자. 그 여자에 대해서 여자 스스로 속내를 털어낸 책을 발견한다면 남자로서도 그렇지만 자기를 몰라주는 남자 때문에 속상한 여자들 또한 반가워할 일이다. 베스트셀러 <하드록까페>의 저자 신중선이 2006년 대한민국소설문학대상을 받고 새로이 내놓은 장편 <돈 워리 마미>
20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미술 분야에 팝 아트(Pop Art), 음악에 아트 락 등이 생겨났다. 신중선의 소설이 가진 사조적 가늠은 팝 아트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자유롭고 평이하게 보이는 문장과 주제를 끌어가기 위해 등장하는 소재와 일화들은 소설문학이 가진 엄숙함에 대해 자유스러워 보인다. 그것이 해방인지, 일탈인지는 성급하게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
원고지 800매 정도로, 분량으로만 따져도 가벼운 신중선의 소설 <돈 워리 마미>엔 특별한 사람도 없고, 놀랄 만한 사건도 없다. 이미 딸이었다가 현재 엄마가 된 사람이라면 너무도 잘 이해할 내용이겠고, 이제 대학 졸업 즈음의 딸이라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문제도 될 수 있다. 일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아빠에 집착하는 감정)라는 심리학 용어가 존재하듯이 엄마와 딸은, 특히 딸의 입장에서 애증의 긴 터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딸은 자라서 엄마의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소설 아닌가. 평범해 보일 법도 하지만 엄마와 딸인 두 여자는 사실 특별하다. 단정지을 수는 없고, 누구나 그럴 법하지만 시쳇말로 2% 다른 면을 보이는 두 여자의 이야기는 주로 딸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그러다가 추리소설이 아닌데도 마지막에서의 반전성 대단원은 불현듯 짙은 카타르시스로 급격히 몰아간다.
우선 소설의 화자인 딸의 엄마는 특별하다. 어린 시절의 갈망을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남자는 이해 못할 여성의 한 일면이 될 것이다. 딸의 엄마는 노란 해바라기 한 다발로 멋진 남성의 프러포즈를 꿈꾼다. 꿈은 꿈일 뿐이라서 그 바람을 실현시켜주는 남자는 없다. 먼저 소설 전반을 차지하는 일화들을 건성으로 연결짓자면 마치 딸이 엄마에게 가진 반항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런 엄마하고 사는 딸에 대한 연민도 은근히 생길 법하다. 동시에 딸을 나무라는 심정도 없지 않다. 특별한 환경에서 태어난 누구가 아니라면 구체적 조건들은 차이가 있을 지라도 오랜 세월 엄마란 단어는 인고의 상징이 아니었는가. 그것이 신중선이 노리는 독자와의 심리전이 아닐까 싶다. 일단 화자가 딸이기 때문에 독자는 누구나 딸의 일인칭 시점에 서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일인칭인 동시에 전지적 시점을 가지기에 중간중간 딸을 보듬다가 이내 엄마쪽에 돌아서서 딸을 노려보게도 된다.
그렇게 독자를 왕복달리기 시키는 딸과 엄마가 보이는 애증의 선로 그 끝은 다행스럽게도 행복하다. 눈물겹게 행복하다. 비록 엄마는 전보다 더 불행해졌지만 애증에서 증을 버리고 애로 승화되어 다행스럽다. 아니 대부분 엄마와 딸이라면 결국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엄마와 딸은 지금도 아들 혹은 남편이 다가오지 못하는 또 다른 자기들만의 방을 갖고 있을 것이다.
비록 소설 속 엄마는 그 행복한 카타르시스를 알지 못한 채 마침표를 찍고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멋내기가 아니라 그 엄마의 삶 속에선 오히려 개연성을 갖는다. 서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수도 없이 경험하는 머피의 장난을 작가는 정직하게 담아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신중선은 픽션 뒤에 숨기보다는 픽션을 통해 오히려 더 절절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 형식상 팝 아트적 특성을 보이는 소설 <돈 워리 마미>는 엄마의 불행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단역 영화배우 출신으로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엄마는 외출할 때면 소위 짝퉁 명품으로 몸을 휘두른다. 그것에 대해 직접 발언하지는 않지만 딸의 독백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일상적인 비판을 견지한다. 얼핏 보면 엄마를 비난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과정은 개인의 그릇된 판단보다는 외부 사회에 있음을 지적한다.
아무리 상상력과 취재를 많이 하더라도 이런 소설은 남자가 쓰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여성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성보다 남성이 읽어서 오랜 화두인 여자알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부자와는 같은 듯하지만 분명 다를 수밖에 없는 관계의 애증, 갈등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화해의 귀결을 통해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특별하게 시선을 끌만한 자극적 요소가 없음에도 대단히 빨리 읽힌다. 마치 친숙한 사람들과 몇 시간 대화하듯 그렇게 후딱 소설 한 권을 읽게 된다. 문장에 치장을 하거나, 낯선 단어들로 문학임을 강요하는 법도 없다. 쉽고 빨리 읽혀 그야말로 이야기인 소설이 갖춰야 할 덕목에 우선 충실하다. 그런데 다 읽고 책을 덮을 때쯤이면 비록 남성이라 할지라도 가슴 한 구석에 여운이 남게 할 무엇이 있다.
신중선의 소설을 읽은 인터넷 책방 북토피아의 독자 서평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한 때는, 한 때는 끝없이 샘솟는 꿈을 머금기에도 벅차기만 하던, 그것만으로도 예쁘게 반짝이는 여자아이였던 우리 엄마에게 그 반짝임을 향한 향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제는 쉰이 훌쩍 넘어버린 우리 엄마, 그리고 그 안의 작은 여자아이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나에게,내 안의 반짝이는 꼬맹이에게. 엄마 사랑해' (독자 조영원 씨)
'이 작가의 글은 참 세심하면서 재미있는 것 같다. 돈워리마미, 요즘에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왠지 쑥스러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그 말을, 읽고 나서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독자 김지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