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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밀면서 축구하기.
휠체어 밀면서 축구하기. ⓒ 김혜원
"차도 뺏기고 내 집에 내 맘대로 못질 하나 못하고. 도무지 나는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냐?"
"애비가 뭐라 하면 들어주지도 않고, 뭐든 하지 말라고만 하고… 내가 이렇게 더 살면 뭐하냐. 그냥 콱 죽어버리고 말란다."
"아휴~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가 되어서. 딸년한테까지 무시를 당하고… 아휴~ 내 팔자야."


요즘 들어 부쩍 부산스러움이 심해지신 아버지가 아침부터 화를 내십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내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손수 운전을 하고 다니시던 차를 더 이상 운전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의 첫 증상은 손수 운전을 하고 누군가의 집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증상이 크고 작은 접촉 사고를 내시는 것이었지요. 운전을 하고 가시다가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헤매기를 몇 번, 크고 작은 접촉 사고는 수십 번. 결국 아버지는 치매진단을 받으셨고 의사와 의논해 아버지에게서 차를 뺏기로 했던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매 증상이 나타나면서 전기드릴이나 망치를 가지고 집안 여기저기에 필요하지 않는 못질을 하거나 구멍을 내는 것을 좋아하셔서 집도 망가지지만 당신도 다치는 일이 적지 않아 공구를 모두 감추어버리고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운전과 못질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즐거움을 아버지에게서 빼앗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감각과 기능이 예전에 비해 절반 이상 떨어진 상태의 아버지에게 운전과 못질을 맡겨둔다는 것은 사고를 예상하면서도 위험에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사정을 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조금씩 욕구를 줄여나가고 있는 상태랍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는 날은 오늘 아침처럼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이 화를 내곤 하십니다. 그럴 때면 저 역시 아버지가 환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맞서 강하게 아버지를 억누르곤 하지요.

"위험하다잖아요. 그렇게 운전하고 나가셨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실려구요. 제가 모셔다드린다잖아요. 어디든 제가 모셔다 드린다는데 왜 그러세요."
"내 차 놔두고 왜 네 차를 타냐? 내가 운전을 너만 못 하냐 경력이 너만 못하냐. 너 언제부터 아버지를 그렇게 무시했냐? 아버지한테 그렇게 잔소리 하려면 나가라. 도무지 딸년 등쌀에 살 수가 있냐?"
"아부지. 정말 나가요? 나가면 다신 안 볼거예요. 그게 아부지 소원이죠?"

이렇게까지 나가면 안 되는데. 오늘 아침엔 왠일인지 생각지도 못한 독한 말들이 막 쏟아져나옵니다. 눈물까지 마구 쏟아집니다.

포달스럽게 퍼부어대는 딸년의 기세에 기가 질려버리셨는지 낼모래 쉰을 바라보는 딸이 어린애처럼 눈물바람까지 하는 것이 마음 아프셨던지 아버지는 이내 다 포기하신 표정으로 백기를 드십니다.

"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 애비가 다 잘못했어. 운전 안 한다. 못질도 안 해. 그럼 됐지? 그만둬라. 내가 얼른 죽어야지. 자식들한테 자꾸만 짐만 되고…."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를 돌보아드린다고 친정에 들어와 살면서 벌써 두 번째 아버지와 큰소리를 내고 눈물바람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이 병때문인 줄 알면서도 때때로 저의 감정이 앞서 아버지도 저도 상처를 받곤 하는 것이지요.

눈물을 닦으며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지친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계신 아버지가 보입니다. 한때는 하늘과 같은 아버지셨는데. 이제는 정말 당신의 말씀처럼 운전도 못하고 당신 집에 당신 마음대로 못도 하나 박지 못하게 하니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장애아들과 소풍을 나온 아버지
장애아들과 소풍을 나온 아버지 ⓒ 김혜원
5월 13일 오늘은 마침 장애아들과 소풍을 가기로 한 날입니다. 몸 아프신 아버지 비위 하나 못 맞춰드리면서 장애아들을 위한 봉사를 나간다고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미 약속한 일정이라 빠질 수도 없고 차라리 풀죽어 계신 아버지 기분도 풀어 드릴 겸 모시고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소리 지르고 눈물 바람 할 땐 언제고 제 마음 편하자고 함께 소풍을 가자고하니 저는 병주고 약주는 딸이 맞습니다.

"아버지 오늘 장애아들 데리고 소풍가는데 함께 가실래요? 가서 저 대신 그 아이들하고 놀아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봉사활동이요."
"어, 그래. 내가 뭐 도와줄 만한 일이 있을까?"
"그럼요. 휠체어만 밀어주셔도 감사하지요."

장애아들과 함께 놀아주시는 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즐거워 보이십니다. 밝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힘은 드시겠지만 모시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도 아침에 딸과 한판 했던 일들은 벌써 다 잊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병 때문에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잊어주신다는 것이지요. 물론 가끔씩은 아버지가 짐짓 잊은 체 해주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요.

오늘도 저는 아버지와 한바탕 싸우면서 사랑을 배웁니다. 속 좁은 딸년은 아침에 아버지와 한바탕 벌린 입씨름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데 착하고 고마운 우리 아버지는 어느새 다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즐거웠던 소풍이야기만 하십니다. 오늘도 저는 아버지와 한바탕 싸움끝에 큰 사랑을 배웁니다.

아직은 힘든 치매 아버지와 싸우며 사랑하기, 차차 조금씩 요령이 생기겠지요.
#치매#아버지#장애인#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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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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