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교총이 주최한 `스승의 날` 기념식 및 교육공로자 표창식.
한국교총이 주최한 `스승의 날` 기념식 및 교육공로자 표창식.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우리나라에서 스승의 날은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은 '올해는 선생님께 무엇을 해드려야 하나'라는 스승의 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스승의 날 때문에 도리어 '경멸과 원망'으로 전락할 지경이다.

스승의 날에 이루어지는 '이바지'는 마치 국민 공통 준조세와 같은 성격이어서, 이 나라의 유·초·중등 학부모와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이 스트레스를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정식 세금처럼 공식적으로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 '납부액' 산정에 대한 눈치작전 스트레스에까지 이중으로 시달려야 한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부모들

최근 아르바이트 전문 구인구직 포털 알바몬 조사 결과에 의하면, 스승의 날에 선물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은 그 이유로 '학 점관리(41.2%), '(교수와) 친해지고 싶어서(19%)', '그냥 스승의 날이니까 선물한다(15.3%)', '교수님께 눈도장을 찍거나 일종의 아부로서 준비한다(10.8%)' 등을 꼽았다. '교수님을 존경해서'라고 응답은 10.6%에 불과했다.

스승의 날에 이루어지는 각종 '감사 의례'의 본질이, 사실은 '대가를 바라는 뇌물 상납'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결과다. 노골적인 뇌물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감사나 존경과는 이렇다 할 연관이 없는 관성적 행위이거나, 학부모의 경우 자기 자식이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준비하는 일종의 '보험 들기'에 불과하다.

대가를 바라면서 약자가 강자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범국가적 이벤트를 '스승에 대한 감사, 존경'이라는 말로 치장하는 위선과 이중성은 그 자체로 비교육적이다. 스승의 날이 스승을 격하시키고, 학교에서 교육을 몰아내고 있다.

금품을 보다 많이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금품을 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자로부터 가난한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누진적 구조가 형성된다.

만약에 세금이라면 누진납세는 공공적 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금품제공 행위는, 그 성격상 뇌물에 가까우므로 '누진상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진상납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유는 그것이 대가를 바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대가란 스승의 관심과 호의다. 결국 능력별로 스승의 관심과 호의를 차등 구입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미국 한인들, '50달러 이하 선물주기 운동' 벌여

스승의 날에 이루어지는 '이바지'는 마치 국민 공통 준조세와 같은 성격이다.
스승의 날에 이루어지는 '이바지'는 마치 국민 공통 준조세와 같은 성격이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리하여 스승의 날은 덜 바친 부모의 가슴엔 한을, 일부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로 오해를 받는 전체 스승의 가슴엔 자괴감과 모멸감을, 아이들 가슴엔 일찍부터 불신과 비굴함이란 상처를 남겨주게 된다.

그런 강박관념에 길들여진 한국의 학부모들은 미국에 가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뉴욕 한인 학부모 협의회는 스승의 날(미국에선 매월 5월 둘째주 화요일) 선물을 50달러(4만6500원 가량) 이하에서 준비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한국 학부모들의 고액 선물 관행이 미국 사회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일생이 중등과정의 성적 서열로 정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식 학교생활에 온 신경을 쏟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학년 초에 있는 스승의 날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의 날 이후에 긴 학교생활이 남아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마치 아이를 학교에 볼모로 잡힌 것과 같은 심정이 된다.

스승의 날 이후의 학교생활을 그럴 수만 있다면 돈으로라도 사고 싶다는 강박감이 구조적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학년 초에 있는 스승의 날은 결국 '학부모가 자기 자식의 향후 1년을 위해 스승에게 성의를 보이는 날'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의 학교 사회는 민주적 지배가 아닌 관료적 지배구조여서, 상층권력에 대항하는 교사를 거세하는 권력은 잘 작동하나 학생에 대한 교사의 자의성이나 폭력성을 견제할 장치가 미약하다. 학생회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다. 또 과밀학급에서 교사의 관심은 어차피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를 그런 학교에 내맡긴 학부모는 학년 초 스승의 날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위선의 날' 하나는 사라질 것

지난 2004년 5월 12일 광주시교육청 앞에서 '선물 없는 스승의 날'의 동참을 호소하며 릴레이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교사가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2004년 5월 12일 광주시교육청 앞에서 '선물 없는 스승의 날'의 동참을 호소하며 릴레이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교사가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안현주
서울지역 초·중등 과정 학교 중 27%가 스승의 날에 휴교한다고 한다. 강원지역은 47%, 부산지역은 38%, 대전·충남지역은 79%, 충북지역은 44%, 광주지역은 25.9%. 울산지역은 41.4%, 제주지역은 70%가 각각 스승의 날에 휴교할 예정이다.

스승의 날에 벌어지는 금품상납 이벤트를 막아보고자 휴교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휴교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스승의 날 당일에 학교문을 닫는다고 해도 스승의 날 시즌에 금품을 상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참교육학부모회는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은 학년말 책거리 행사와 함께!!'라는 스승의 날 옮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고통을 깊이 체감하는 학부모가 앞장서서 스승의 날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학부모들의 주장처럼 일년 동안 배운 것을 감사하는 학년말로 스승의 날을 옮겨야 한다.

지금과 같은 스승의 날이 우리 공동체에 주는 건 긍정성보다 불신·원망·스트레스·한·부패·경멸 등의 부정적 유산이 더 크다. 지금처럼 학년 초 스승의 날 유지할 이유가 없다.

스승의 날을 뒤로 미룬다고 부모 능력에 따른 교육격차가 사라지거나, 촌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국가 제도적으로 스승을 욕보이고 국민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위선의 날' 하나는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교육#스승의날#참교육학부모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