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 김성일 장군 한글 편지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12월 24일. 학봉 김성일 장군이 경상우도감사로서 경상도 산음(지금의 산청)에서 안동에 있는 본가의 정부인 권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학봉 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운장각(경북 안동시 금계)에 보관되어 있다.
전쟁 중에 부인에게 보낸 이 편지는 선생의 마지막을 알리려는 듯한 비장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를 받을 무렵에는 본가는 안동군 임하면 남실이라는 곳에 피란을 하고 있었다.
이 편지를 보낸 뒤로 4개월이 지난 4월 29일, 선생은 전란과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아침저녁 끼니에 수저 드는 것도 차마 어려워하다가 과로로 숭고한 삶을 마치셨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처럼 정사 황윤길과 갈등으로 일본의 침략을 외면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가서 일본의 사신 접대나 임금님의 국서 전달 과정에서 정사의 비굴함을 바로 잡으려 하다가 서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한다.
일본의 답서에 조선을 업신여긴 '각하(閣下)' '방물(方物)' '입조(入朝)' 등의 치욕적인 문구를 그대로 볼 수 없다고 항변을 하여 고치게 하는 등 조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싸웠고, 돌아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만큼 민심을 뒤흔드는 '일본침략설' 때문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황윤길의 보고가 헛된 것이라 보고하여 민심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500여년 전의 우리 글 사용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문헌적 가치가 있는 편지글을 그대로 적고 옮겨 보려 한다.
이 편지를 보면 그의 진면목을 되새겨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를 요즘 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추위에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思念)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오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직산(稷山)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 마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들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 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 못 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전란 중에 가장으로서 책무를 느끼고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본댁에 설날 음식 하나 못 보내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그의 진심이 절절히 흐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녹원환경뉴스, 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 개인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