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공 정권 시기 방송과 신문 등 언론기관은 정부의 감시와 통제 속에 인위적인 통폐합의 대상이 되었으며, 취재와 보도의 자율성 역시 보장받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초기였던 1980년 11월 14일 '언론구조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언론 통폐합'을 감행한다.
신문의 경우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흡수시켰으며, 경제지 중 정상을 달리던 <서울경제신문>과 함께 <내외경제신문>을 자진 폐간시켰다. 방송의 경우에는 KBS를 한국방송공사로 개편하면서 TBC 동양방송(현 KBS 2TV)을 KBS에 흡수시켰고, 기독교방송은 복음방송만 허용해 보도 기능을 제한했다.
이어 12월에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언론통제의 기초를 마련하고, 일상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계엄하의 언론검열단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으로 문화공보부 산하에 홍보조정실을 신설하였다.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거의 매일 신문과 방송 등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작성하여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를 통해 5공 정권 시절의 한국 언론들은 신군부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매일 아침 발행되는 일간지는 1면에서 사회면까지 제목 크기와 활자가 모두 통일됐으며, 문공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베껴 쓴 어용기사들로 가득했다. 또한 각 방송사 9시뉴스에 경우 ‘땡’하는 시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 뉴스 첫머리에 등장하는 ‘땡전 뉴스’가 매일같이 판을 쳤다.
그러는 사이에 제 기능을 잃은 기성언론의 보도행태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대학가의 대자보와 거리에서 나누어 주는 민주단체의 인쇄물 등이 그들의 눈과 귀를 대신하게 된다. 이와 함께 우리사회의 정의를 말하고 진실을 알리는 '민주언론'에 대한 국민적인 열망도 커져만 갔다.
그 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은폐되어온 박종철씨 고문 치사사건의 진실이 87년 5월 고 김승훈 신부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그동안 사건의 진실을 외면한 채 5공 정권을 두둔하기에 급급했던 기성언론의 태도는 국민들의 울분과 분노를 폭발시키며,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불씨를 제공한다.
6월 항쟁의 성과물 <한겨레신문>
결국 6월 항쟁은 5공 정권의 막을 내리게 했고, 민주언론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는 당시 기성언론에 대한 반성과 함께 1988년 5월 15일 한국 언론자유화의 초석을 다진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 해직기자들과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한겨레신문>은 고 송건호씨를 초대사장으로 선임했다. 6만여 명의 국민들은 6월 항쟁 이후 집권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대자본 세력으로부터 편집권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모았다.
또한 민주, 민족, 통일의 창간정신은 어둡고 암울했던 80년대 독재정권시대에 절망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새로운 역사의 주체자로서 변혁의 길에 직접 참여해 이를 실현시키려는 국민적 염원이 담겨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 정권 하에서 국민들은 올바른 정보에 목말라 했고 언론자유와 바른 언론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는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적 언론이 없이는 진정한 민주화를 일궈 낼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지금까지도 그날의 정신은 언론의 중요한 사회적 사명으로써 이어지고 있다.
2007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은 창간 19돌을 맞는다. 그동안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문화의 자유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이와 함께 우리사회의 민주화도 발전되어 왔다. 한겨레의 창간은 6월 항쟁과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이 낳은 소중한 성과물이다. 앞으로도 정론을 추구하고 6월 정신을 소중히 계승하는 민주언론으로서 한겨레의 변함없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