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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의 시체를 뛰어넘던 무서운 추억은 군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살 어린 나이에 시체를 피해 피난 가던 제게도 전쟁은 무서운 추억이었지요. 그 무서움을 뛰어넘게 해주신 분이 초등학교 1학년 여선생님이셨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선생님께서는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난갔던 어린 제가 다녔던 원동초등학교 1학년 담임 원경자 선생님이십니다. 1학년을 맡으시고 2학년으로 올라가던 때 선생님은 결혼을 하셨습니다.

사랑을 잃은 어린 저는 예식장을 나와 울면서 걸었습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눈물 속에 흘러들어 눈물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떠나간 첫사랑처럼 달콤한 슬픔입니다.

제 마음의 소년은 선생님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전쟁 후 폐허 같은 1953년 교정에서 선생님은 나비춤을 가르치실 때 나비 같으셨고 산토끼를 가르치실 때 산토끼같으셨습니다. 생전의 아버님 역시 꼭 한 번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자주 말씀을 하셨기에 황혼의 나이까지 선생님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선생님을 그리워 하는 글을 써서 보냈더니 월간지 한 쪽에 실렸습니다. 그 글을 선생님 조카가 보고, 선생님 소식을 흥부네 제비처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선명한 기억 속에 그리움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4년 전 을지로 입구에 있는 한 장소에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가 선생님께 묻지도, "네가 아무게냐" 묻지 않으셔도 세월의 강 건너 스승과 제자는 담박에 알아보았습니다. 초등학교 6살배기는 57세의 나이였고요, 20대 청춘의 선생님은 칠순의 할머니가 되어 계십니다.

만나 뵈니 반갑고 기뻤습니다. 교직 생활을 끌낸 뒤에 당신을 찾아준 제자가 저 혼자랍니다. 3년 동안만 교편을 잡으셨기에 제자들도 얼마 없어서였겠지요. 그러나 저 말고도 다른 아이들도 선생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잘한다. 착하다."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걸, 제게만 하지는 않았던 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선생님, 뵙고싶었습니다" 이 한 마디를 하는데 50년이 걸렸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선생님의 품에 안겼지만 이번엔 제가 제 품에 선생님을 안았습니다.

점심을 하면서 지난 세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3남매를 두셨고 부군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자주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한 번 꼭 뵙고 싶어하셨어요."
"그래, 아버지께서 내게 잘 해주셨어. 내가 아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칠 때 아버님께서 너를 기다리시다가 나를 지켜보시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지. 내가 결혼 후 교직 생활을 그만 둔다는 소문을 들으시고는 내게 찾아오셔서는 선생님 같은 분이 아이를 가르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고 말리시기까지 했단다."

20대 청년 아버지가 아들의 학교에 찾아 와서는 나비처럼 춤추는 선생님을 홀린 듯 보던 모습이 제게는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일에 한바탕 웃음도 싱그럽습니다.

이렇게 만난 뒤로 선생님은 당신을 찾아준 기쁨을 늘 간직하십니다. 학교 시절 교원 동창 모임에서 제자 자랑을 하시면 다른 분들이 부러워 하신답니다. 다시 보자 하신 말씀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께서는 아드님이 점심을 사겠다며 초대하셨습니다.

아드님 직장 근처 식당에서 점심 대접을 받습니다. 아드님은 마흔 댓쯤의 나이. 아득한 기억 속에서 어머님을 찾아주어 고맙답니다. 지나간 추억을 들으면서 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의 눈빛 초롱초롱한 소년이 되며, 선생님은 24살의 빛나는 청춘이 되십니다.

이제 건강이 염려되는 나이에 저를 만나던 때만도 건강이 못하십니다.

"선생님 어떠세요" 가끔 전화를 드리면 "잊지 않고 전화해줘서 고마워" 하시는 선생님은 어린 시절 소년의 첫사랑에서 이제는 어머니를 닮아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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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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