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번역이란 직종으로 독립 이민을 온 제가 세탁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애시당초 이곳 영어권에서 짧은 영어로 생업을 일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때로는 한국에서 배운 영어가 형편없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곳에는 수많은 인종들이 제 각각의 영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이민온 자들은 짧은 어휘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언어소통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반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어려운 학습영어로 연마된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곳에서 되려 절절매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연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같은 상가내에 'Wee Rent'란 상호의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곳에 처음 이민을 오니까 상호명도 낯설었지만, 과연 저 가게는 무슨 가게일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인근 가게가 무슨 내용의 상거래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있지요.

그 가게는 온갖 종류의 생필품과 공구들을 빌려주는 그런 가게였습니다. 파티용품부터 렌치와 드라이버 등 온갖 종류의 공구를 빌려주는 곳이었습니다. 집에서 제대로 갖추어 놓기 힘든 그런 물품을 대여해주는 곳이었습니다.

저도 가게 지붕 위에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 필터를 교환할 때면 긴 사다리를 빌리곤 했죠. 일년에 한두 번 올라갈 지붕 일을 위하여 긴 사다리를 비치해 두기는 어려워 그런 때 이용하는 가게였습니다.

세탁소는 기계 잔고장이 많아서 배관용 공구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압축공기나 스팀이 수시로 새기 때문입니다. 배관마다 크기가 달라서 크기에 맞는 공구를 장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녹슨 배관을 분해하려면 엄청나게 큰 렌치가 필요할 적도 있어 그럴 땐, 저는 같은 상가의 공구대여점인 그 가게에 갑니다.

그 날도 큰 렌치를 빌려서 일을 마치고 돌려주려 갔습니다. 주인인 백인 영감이 저에게 묻더군요.

"Work?(잘 맞았어?)"

그 한 단어에 짧은 영어는 여지없이 토막나더군요. 저는 신나게 대꾸했습니다.

"Yes, we work all day long.(우린 하루 종일 일해)"

바로 동문서답이죠. 가게로 돌아오며 생각하는데 무언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영감이 물은 것은 내가 일을 하고 있냐는 것이 아니라, 빌려간 렌치가 잘 맞았느냐는 뜻이었죠. 그것도 모르고 저는 그냥 우리가 일을 하는지 아닌지를 물은 것으로 여기고 대답을 해 버린 것이죠.

'work'라는 단어가 일하다는 뜻도 있고 잘 작동하다라는 뜻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죠. 이런 영어로 인한 실수와 무감각은 수도 없을 것이고, 아마 노트로 깨알같이 적어보면 일년이면 노트가 한두 권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작은 실수를 예사로 넘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년 엄청난 돈과 시간을 영어학습에 쏟아붓는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심지어 영어유치원도 모자라서 '영어태교'까지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어실력 자체는 다른 여느 나라보다 별로 늘지 않는다는 그 답답한 기사를 생각합니다.

저도 영어학도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처참할 정도로 무너져 있습니다. 기억에 의존한 학습영어로 모든 생활에 대처하려니 자연 피곤해지고 때로는 영어를 배운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영어에 이렇게 시달려야 하나?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우리 세탁소와 붙어 있는 인도식당 '티키티카(Tikki Tikka)'에서 일하는 '메디'라는 인도 학생이 떠오릅니다. 이 녀석은 우리 큰아이와 같은 학년으로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11학년을 다니다가 큰아이는 한국으로 되돌아갔지만, '메디'는 방과후에 '알바'로 인도식당에서 잡일을 합니다. 성격이 서글서글한 이 녀석은 짧은 발음과 어휘에도 유창한 구사력을 보입니다.

우리 부부를 볼 적이면 꼭 인사를 건네고 그러면 우리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때로는 우리 아들도 이 녀석처럼 좀 서글서글하게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나 하는 미련도 듭니다.

'메디'란 이 학생의 영어는 조금도 주눅듬이 없습니다. 때로는 못알아 들어도 그냥 넘어가고 자기네식 대로 발음하는 것도 조금도 괘념치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족이 부르는 그 '깔라깔라' 영어입니다.

부럽습니다. 중국이면 중국식 영어, 인도면 인도식 영어를 맘껏 구사하는 태도에 비하면 우린 어딘가 주눅들어 있는 듯한 태도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한국식 영어'를 주창해야 할 때가 아닌지요. 아무리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도 지진하게 늘어가는 영어라면 차라리 우리도 이제는 '영미식' 영어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할 때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미 '세계 공용어'의 지위에 오른 영어라면 어느 특정지역의 언어가 아니지 않습니까. '세익스피어'가 말하면 부동의 '명문'이 되는 그런 시대의 영어는 지나갔으니, 이제는 한국식의 영어를 조금씩 만들어 보는 것이 '영어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수십년 배운 영어가 한 번에 무너지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하나만 더 소개하고 글을 마칩니다. 세탁소 일을 마치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저녁을 준비할 때면 종종 '광고전화'가 옵니다.

여기도 모니터 요원들을 동원하여 어떻게 개인정보를 빼서는 마구잡이로 선전용 전화가 걸려옵니다. 영어로 일장연설을 시작하는 짜증나는 전화에 저가 소리칩니다.

"Who is you?"

얼떨결에 전화영어는 "Who is this?"로 묻는다는 학습영어와 "당신 누구요?" 하는 짜증이 섞여 버린거죠. 나름으로 영어깨나 배웠다는 아빠의 엉뚱 영어에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나뒹굽니다. 참 난감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어를 순전히 '대뇌(큰골)'로 배웠으니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적응대화가 되질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자칭 '영어도사'라고 자부하는 '소영웅주의자'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살며시 뒤돌아가서 뒤통수를 내갈기면 "아얏!"이라고 하지 "아우취!(Ouch!)"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도 영어의 짐을 내려 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캐나다 이민생활에서 겪는 영어 소통의 문제입니다.


#영어#한국식 영어#캐나다#이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