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정보 안내책자에는 이곳의 모래사장이 핑크빛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을 끝에 있는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다본 모래사장은 흰색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되어, 우리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면서 물어보았다. 퉁퉁한 몸집의 젊은 여주인은 여기가 뉴 첨스 비치가 맞다고 했다. 오늘은 하얗게 보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햇빛 좋은 날에는 모래사장이 엷은 핑크색으로 보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조금 실망스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고운 흰 모래가 펼쳐져 있는 모래사장 너머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바다에 뫼 산(山)자 형상으로 떠 있는 바위섬이라니! 마치 누군가가 분재를 해놓은 듯한 바위섬이 지키고 있는 해변은 고적하고 아늑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해변을 이리저리 거니는 우리를 방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갑자기 나타난 우리가 이 바닷가에는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드는 저 멀리 바닷가 모래밭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바닷새들이 우리를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가까이 다가서기를 그만두고 우리는 잔뜩 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면서 모래밭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바닷새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일찍이 바닷새들의 차지였던 곳이니 우리가 물러나는 것이 마땅했다. 뫼 산자 형상의 작은 바위섬과 수십 마리 바닷새들은 우리가 떠나고 나서도 무심할 것이나, 그리고 모래사장에 남긴 우리의 어지러운 발자국들도 이내 지워지고 말 것이나, 사진 몇 장에 담아온 그 바닷가는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렇게 그날 찍었던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기억 속에 고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9월의 어느 봄날 그 바닷가를 복원해내고 있는 것이다.
콜빌 잡화점, 저물 무렵에 만난 코로만델 반도 최북단의 구멍가게
뉴 첨스 비치를 출발한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서 코로만델 타운으로 되돌아왔다. 예약해 놓은 모텔에 도착한 오후 4시경, 일단 체크 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은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도로 곳곳에 일방통행의 비좁고 작은 다리들이 복병처럼 숨어 있기는 했어도, 차들이 드물어서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1시간 정도 그렇게 달려서, 19세기 중∙후반에 카우리 나무 제재업의 중심지였던 마을 콜빌(Colville)에 닿았다. 콜빌은 1970년대에는 '뉴질랜드 히피 문화의 수도'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문이 닫혀 있는 낡은 구멍가게 하나였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문을 닫은 콜빌 잡화점(Colville General Store)이 석양빛에 커다란 붉은 간판을 물들이며 도로변에 고적하게 서 있었다. 각종 생필품과 차량용 휘발유, 그리고 낚시꾼들을 위한 미끼 등 온갖 잡화들을 팔고 있는 이 가게는 코로만델 반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상점인데, 간이우체국도 상점 옆에 붙어 있었다.
아, 이 가게의 주인은 누구이며, 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하루에 몇 사람이나 이 가게를 이용할 것이며, 또 간이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는 이들은 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차에서 내려 잠시 가게를 둘러보는 내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들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입 다문 채 말없이 앉아있는 이 낡고 오래된 구멍가게가 눈물겨웠다.
재촉하는 딸아이의 성화를 듣고서야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거기서부터 1~2분 조금 더 북쪽으로 달려가 보니 포장도로는 문득 끝이 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이고 바닷가 절벽을 끼고 달리는 위험한 길이니 4륜구동차 말고는 통행하지 말 것이며 미숙한 운전자도 피할 것을 당부하는 안내판이 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시간도 늦었지만 우리 차는 일반 승용차여서 우리는 그 안내판 너머 길은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턴을 해서 다시 잘 포장된 길을 되돌아오면서도, 나는 안내판이 가로막고 있는 저 비포장도로 너머로만 자꾸 향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유를 꿈꾸었던 뉴질랜드의 히피들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아마도 저 길 너머, 일반인들은 쉽사리 닿지 못하는 코로만델 최북단의 바닷가 어디쯤에 숨어 살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차에서 내려 그 어디쯤을 가늠하며 사진 몇 장을 또 찍었다. 물론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저무는 저녁 하늘 흰 구름이 숨어드는 저 연두색 구릉 너머에서 누군가 저녁밥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기진 배를 안고 모텔로 돌아온 그날 저녁, 우리는 밥을 지어 먹었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다녀온 뉴질랜드의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 세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