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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길을 찾아 중국으로 탈출한 박철승씨는 결국 영국에서 영어의 몸이 되어있다. 사진은 그가 갇혀있는 영국 홈즈 하우스 교도소 전경.
ⓒ 홈즈 하우스 교도소 홈페이지

"감옥에서 사는 것이 차라리 좋아요. 제게는 호텔이나 마찬가지에요."

한 탈북자가 영국 잉글랜드의 한 감옥에 갇혀있다.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감옥에서 그는 오늘도 하루를 보내고 있다.

박철승(가명, 51)씨. 함경북도가 고향인 그는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그리며 외로운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갑갑한 수감생활.

외로운 감옥생활... "그래도 도망다니는 것보다 편하다"

박씨는 "항상 불안하게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도망다니며 사는 것보다는 마음이 훨씬 더 편하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지천명의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그 오랜 시련이 그를 삶에 초연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의외로 담담하고 여유로워 보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 먼 함경북도에서 이곳 영국 땅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거부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잡아갈까 무섭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삶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박씨가 검거후 재판을 벌이는 과정에서 영국 법원과 변호사를 상대로 통역 업무를 한 요크 한인교회 정현진 목사와 유학생 전홍석씨를 통해서 그의 인생역정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지독한 수용소 생활... 중국으로 탈북했지만

박씨의 아버지는 본래 함경북도에서 양 목장을 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이 나서 양들이 다 타죽었고,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모두 탄광 수용소로 보내졌다. 국가 소유 목장을 잘못 운영한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탄광 수용소의 삶은 말 그 자체로 고통의 하루하루였다. "죽어라 일만 하고 지독한 굶주림에 허덕였다"고 회상하는 그는 결국 북한으로부터의 탈출을 결심했다.

북한 경찰들의 감시의 눈을 피해 친척들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고 혈혈단신 중국으로 탈출했다. 1979년의 일이다. 그의 나의 24세.

그러나 중국에서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숨고 도망다니는 기나긴 도피 생활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서 연변 근처 아주 외진 산골의 한 과수원으로 숨어들었다.

처음에는 중국사람들과 언어도 안 통하고 일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참고 견뎌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다른 중국인들에 비해서 월급을 적게 받으면서 차별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았다.

생활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박씨는 몇 년후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래서, 두 명의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자 신분. 함께 살 수 없었다. 아들들은 과수원 주인집에서 맡겨져 살았고, 박씨 부부는 산골에 있는 과수원에서 열매를 따고 풀을 제거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자유 찾아 영국으로!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가정을 꾸렸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언젠가 잡힐지 모른다는 도피생활로 인한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항상 짓눌렀다. 한번 사는 인생, 다리 좀 펴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그는 남한에서 왔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당신이 영국으로 가 망명신청을 하면 안 받아줄 이유가 없다"며 영국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조 중국 여권 마련과 항공비 등의 명목으로 1000만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돈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도피생활을 끝내고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난 2003년,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박씨는 남한사람과 함께 드디어 영국으로 향했다. 난생 처음 와본 런던 히드로 공항. 그는 가슴을 졸이면서 위조된 중국신분의 여권을 검색대에 내놓았다. 다행히 그는 검색대를 통과했고, 풀어진 긴장을 달래려 화장실로 향했다. 시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같이 온 남한 사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고, 결국 영어 한마디 못하는 그는 낯선 런던의 한복판에 내버려졌다.

▲ 영국의 수도 런던의 대문 히드로 공항. 자신을 데려온 남한 사람을 여기서 잃어버린 박씨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 AP=연합뉴스
최저임금의 절반 월급, 그래도 참았다

앞 일이 까마득하게 막막했다. '왜 내게 또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그는 "두 명의 한국인 유학생을 거리에서 만났고, 그들의 안내로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런던의 뉴몰든 지역으로 여겨진다)으로 갔다"고 한다.

한 민박집에서 생활한 그는 김씨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를 통해서 "중국여권이 있으니 중국사람으로 영국에 이민신청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고, 고민 끝에 그는 이를 신청한다.

그러나, 이민신청은 보기좋게 거절당했고,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 사이에 비자 기한마저 만료되어 버렸다. 다시 도피신세로 전락한 그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떻게든 영국 경찰의 눈을 피해서 살아야만 했다.

그는 김씨의 소개로 북부 잉글랜드의 한 공장을 소개받는다. 중국인과 다른 탈북자 등이 함께 거주하면서 텔레비전 부품을 조립하는 곳이었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 곳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시간당 3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는데 제대로 받은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일이 줄고 그러면 시간당 2파운드만 주기도 했다고. 그의 신분을 악용해 영국 법정최저임금(시간당 약 5.5파운드)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시급을 지급한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참고 견뎌야 했다.

칼부림이 난 회식 자리... 다시 도피자 신세

그러던 2004년 2월 쯤. 숙소에서 회식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약간 감정의 앙금이 있던 공장의 한 매니저와 박씨가 술을 마신 뒤 말다툼을 벌였다.

이를 불쾌히 여긴 매니저가 박씨를 때리고 몽둥이를 가져오자 순간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실랑이 끝에 결국 칼부림으로까지 번졌다. 매니저는 칼에 찔려 쓰러졌고, 박씨는 "불법 이민자로 붙잡힐까봐 무서워 바로 런던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 때부터 박씨의 런던 유랑이 또 시작됐다. 그는 런던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지난해 9월께 런던의 한 슈퍼마켓에서 돼지고기를 훔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아마도 극심한 배고픔 때문이 아닐까. 그는 영국 경찰에 의해서 이미 살인미수 혐의로 수배중인 상태였고, 바로 철창신세가 되었다.

이후 그의 살인미수 혐의를 두고 올 초부터 법원의 재판이 시작됐다. 칼로 찌른 행위에 대해 박씨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매니저가 유도해서 매니저 본인이 직접 찌른 것이다, 살인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반면에, 매니저는 "박씨가 의도적으로 찌른 것"이라고 팽팽하게 맞섰다.

이 사건을 지켜본 동료들의 증언도 서로 갈렸고, 사건은 공전을 거듭했다. 박씨는 "내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내가 왜 당해야만 하느냐"며 정현진 목사에게 하소연 했다고 한다.

불안한 하루하루... 언제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

최근에 영국 변호사는 박씨에게 당신이 아무리 혐의를 인정하지 않아도 최소 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질 수 있으니 양측간에 합의를 해서 2~3년으로 형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혐의를 인정하면 앞으로 할 망명이나 이민신청이 거부되어서 북한으로 추방당할 것이 두려웠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이 중재안을 받였고, 결국 영국 재판부로부터 2년의 최종 판결을 받았다. 영국 재판부는 "피고인을 강제로 송환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을 재판 내용에 포함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강제추방' '강제송환' 등으로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영어의 몸에 앞으로 출소를 해도 영국 정부가 망명을 받아줄 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들고 불안할수록 중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에게 엄습하고 있다고 한다.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에 있는 가족과 비교적 자주 전화 연락을 하곤 했다. 하지만, 교도소에서는 이마저 불안하다.

외부에 전화하는 것이 허용되기는 하지만 영국 정부가 도청을 해서 그의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줄 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 목소리가 그리워서 전화를 한두 번 했다고 한다.

"아내는 산골 과수원에 있어서 통화를 못했어요. 주인집에 있는 아들하고만 통화를 했지요. 그냥 잘 있다고만 말했어요. 감옥에 있다고 말하면 걱정만 하지 뭐하겠어요…."

정현진 목사는 그의 답답한 마음을 전했다.

"아들에겐 그냥 잘 있다고만 했어요"

그래도 그는 비교적 꾹꾹 잘 참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는 불투명하지만 앞으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시민권을 받아 장차 중국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불러 같이 사는 것 말이다.

가족이 함께 같이 사는 것.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그에게는 왜 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만 한 것일까.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마음 편하게 다리 쭉 펴고 살 수 있는 날이 언제 올 것인가.

최근에 그를 면회한 전홍석씨는 "면회하는 사람도 하나 없고 감옥에서 말도 안 통해서 그런지 나를 붙잡고 하염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며 그의 딱한 상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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