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15. 스승의 날. 그 말썽 많은 날, 국립민속박물관의 자원봉사자들은 박물관 측에서 제공한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부안으로 향했다. 부안은 우리 민속박물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제1관에 들어서면 전시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디오라마 기법으로 전시된 세 번째 전시물인 '죽막동 제사 유적'이 있다. 이 죽막동 유적지가 발굴된 현장이 바로 이 부안의 바닷가에 있다. 부안읍에서 불과 20여분 거리에 있는 수성당이라 불리는 당집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 부안 지역을 찾아서, 부안 읍성과 당간, 짐대 등을 보고, 채석강, 수성당<죽막동>, 내소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체험활동을 마치기로 되어 있다.
부안읍성을 보기 위해서 군청 마당에 차를 대자 이곳의 문화해설사 한분과 전주대학 교수이자 이 고장 유물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의 해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읍사무소에서 불과 100여m 거리에 있는 남문 밖에 세워졌던 짐대부터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읍내 한복판에 자리 잡았던 초등학교가 어찌된 영문인지 폐교가 되고, 그 커다란 학교 건물의 교실과 운동장, 시설 들이 모두다 그대로 방치 되어 있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 이렇게 좋은 학교가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어디에도 그 까닭을 알리는 글도 게시판도 없으니 교육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이 학교 교실에서 10m도 안 되는 자리에 이 돛대가 세워져 있었다. 읍성의 남문 밖에 세워졌던 짐대(솟대를 여기에서는 짐대라고 주장하였다)는 여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보통 솟대는 나무로 만들어 세운 장대 위에 가로 막대를 얹고 그 위에 기러기나 새를 만들어 올려 앉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세워진 돛대는 마치 배의 돛대처럼 끝이 뾰족하게 세워져 있었다. 다만 위 부분만은 돌 한 개로 모두 완성을 할 수가 없었던지 다른 돌로 깎아 만들어 붙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부안 읍성의 남문 밖에 돛대를 만들어 세운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 곳의 풍수지리학상의 지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 지역을 보호하는 '비보 입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모양이다. 다시 말해 부안이라는 곳이 지형 상으로 봉황산을 선미로 하는 배 모양의 지형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곳은 저습지이어서 안정을 찾으려면 무거운 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내려갈 듯한 이 지형을 단단히 고정 시키기 위해 무거운 돌로 만든 말뚝을 박아서 고장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배 모양의 지형에 돛대를 세워서 흘러가더라도 바로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돛대를 세워 놓고 동, 서 양 쪽의 문 밖에는 장승을 세워서 모든 잡것들의 성안 출입을 막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서 장승이란 마을 입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것들을 감시하고 검열하여서 나쁜 것, 사한 것들의 출입을 막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승의 얼굴이 코믹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그 본령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장수가 웃는 얼굴을 하면 어떻게 엄하게 지휘를 할 수 있으며, 나쁜 것을 쫓아 낼 수가 있겠는가 하는 해설자의 말은 어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장승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흔히 솟대는 삼한 시절의 신앙의 중심지였던 소도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설을 맡은 박사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솟대를 모시는 사람들은 그 지방의 민간인 들이다.
그런데 이 지방의 민간인, 솟대를 모시고 제사나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것을 솟대라 부는 법이 없었단다. 모두 짐대(짐을 진 대)라고 불렀으며, 그렇게 알고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책상 앞에서 만든 이론과 실제로 신앙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말 중에서 어떤 쪽을 믿어야 할 것인가?
솟대는 민속 신앙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역시 그것을 모시고 사는 민간신앙을 가진 사람들, 바로 이 짐대를 가까이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들의 말이 논리 정연하지 못하고 이론적 배경이 빈약 할 지라도 그들이 신앙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그것이 민속신앙이고 민속 유물이며, 민속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솟대라는 말은 학자들의 이야기 일뿐 민간에서는 솟대라는 말조차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매년 제사를 모시면서도 솟대라는 말을 쓰지도 않고, 소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제사를 모신다는 것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솟대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돛대와 서문 안에 세워졌던 짐대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이것은 1689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명문이 박혀 있는 짐대가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 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짐대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부안의 돛대와 짐대는 우리나라 짐대 역사의 가장 오래된 유물이며, 어디에도 이 보다 더 오랜 기록을 가진 짐대(솟대)는 없다고 자신하였다.
이 남문의 돛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데 그것이 1689년으로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짐대라는 것이다. 아울러 서문 안에 짐대에는 오리가 없어지고 대신에 꼭지 부근에 오리 모양을 새겨 놓아서 없어진 오리의 기능을 할 수 있기를 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었다.
우리나라 대분의 짐대에는 오리가 올라 앉아 잇는데 전체의 약 90%가 오리이고, 8% 정도가 기러기를 새겼으며, 2% 정도가 다른 새들을 새기거나 만들어 앉히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여기 세워진 장승은 서문 밖의 것을 한데 모아둔 것으로 장승은 본래 사찰의 것이 민간에게로 옮겨 온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도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사찰뿐만 아닌 일반 마을의 입구에도 장승이 나타나게 되었단다.
마지막으로 가본 석당간은 읍성의 바깥 마을인 서이리에서 세워졌던 것으로 이런 당간이 있다는 것은 어쩜 이곳에 큰 절이 있었던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석당간은 다른 것과는 달리 다섯 조각의 돌을 이어 올린 것으로 이어준 자리는 철못으로 고정을 시켜서 움직이지 않게 잘 고정이 되어 있었다.
이 당간의 몸에는 용이 꿈틀거리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새겨 넣었고, 거북과 천도복숭아를 새겨서 도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
우리가 강의를 듣고 있을 때 마을의 할머니 한분이 지나면서 "학생들이 많이 왔구만, 이곳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지금도 동제를 지내고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짐대 이론처럼 현지주민의 이 말씀은 몇 십분 동안 설명을 해준 교수님의 이야기보다 더 현실성이 있고, 확실한 증언이었다.
석당간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부안 읍성에서의 현장 답사는 끝이 나고 점심은 격포항으로 나가서 먹기로 하였기 때문에 서둘러 격포항으로 떠났다. 가는 동안에도 이 고장의 해설사는 자세한 안내와 얽혀 있는 설화를 하나라도 더 들려주려고 애를 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녹원환경뉴스,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개인불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