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오대산 깊은 곳, 스님 한 분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염불암은 차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암자이다. 그런데 스님도 아니면서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삼아 사색의 행복을 마음껏 누려온 이가 있다.
주인공 안재인씨는 지난 2년간 사십여 차례가 넘게 염불암을 오르내렸다. 그는 염불암에서 보고 느낀 여러 경험들과 사계절의 풍경들을 고스란히 담아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를 펴냈다. 책 안 가득 전하는 향기로운 글들과 담백한 사진들은, 삶을 거닐며 새겨 온 그의 발자국이자 손자국이지 싶다.
"<잡보장경>에서 이렇게 이릅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고 공순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대할 수 있으며 예의바르고 친절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
"꾸미지 않고 서 있는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
도시 속 일상에 찌든 사람이 볼 때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픈 몸과 이런저런 이유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백수생활(?)을 한다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따뜻한 눈길로 삶을 가꾸고 넉넉한 가슴으로 염불암을 품은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 마음을 부모에게 바치면 효심이, 자식에게 쏟으면 자애가, 친구와 주고받으면 우정이, 이성에게 건네면 연모가, 부처에게 향하면 불심이, 중생에게 베풀면 자비가 될 것이고, 이와 같은 마음은 결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니,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행복이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겠지요."
저자가 들려주는 염불암 이야기는 겨울에서 시작해 봄과 여름을 거쳐 가을의 풍경으로 마무리된다. 같은 곳에서 사계절의 순환을 두 번 겪은 저자의 눈길을 따라가면, 겨울에 보지 못하던 것이 여름에는 보이고 봄에 느껴지지 않던 것이 가을에는 느껴짐을 알 수 있다.
"지난 겨울, 눈꽃을 피워 낸 풀 한 포기를 보았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늘, 다른 풀 한 포기가 스스로 뽐내려 하지 않았지만 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꾸며 대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리인 듯싶습니다."
"염불암의 연등은 오직 하나"
오직 한 분의 스님만이 머물러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염불암도 저자의 눈에는 갈 때마다 다르게 들어온다. 유독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는 절집을 찾지 않는다던 저자가 어느 부처님 오신 날 어머니를 모시고 오대산 상원사에 들린 뒤, 홀로 가 본 염불암은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적멸보궁과 상원사는 그 밑에 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연등이 빽빽이 걸려 있고, 연등마다 가족의 이름을 적어 저마다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염불암에 걸린 연등은 오직 하나이고 어느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소망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깨달음을 기원하는 연등이지 싶습니다."
저자는 이어 "수많은 연등이 곧 내 마음이라 한다면, 그 곳에는 번뇌의 연등, 망상의 연등, 탐욕의 연등, 집착의 연등도 존재하니, 그 많은 연등 중에서 당신 만나기 위한 연등 하나는 과연 어떤 것인지 헛갈릴 뿐"이지만 "오로지 하나 걸려 있으니 저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띕니다"며 염불암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서암스님 열반송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노라"
저자는 염불암에서 사색하는 중간 중간에 여러 스님들에 얽힌 일화들을 들려준다. 스님께 법문을 청해 듣듯 이 일화들을 음미해 보면, 저자의 말마따나 "내 맘 속의 자만을 녹여 하심(기자 주-下心,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아는 것)을 피어나게" 할지도 모른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사람들이 열반송(涅槃頌)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살고 남기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 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히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이는 서암스님에 얽힌 일화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노라"는, 말씀 그대로 지난 2003년 스님의 다비식 만장에 적혀 열반송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혜총스님과 자운스님의 일화. 꽃을 키우는 사람은 마음 나쁜 사람이 없다는 운허스님의 말씀을 듣고 혜총스님이 분재 아흔 개 정도를 키우다가 모두 죽게 하자, 자운스님이 혜총스님을 불러 이런 대화를 나눈다.
"네가 꽃을 사랑하느냐?"
"네."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
"자유자재로 클 수 있는 나무를 네 입장에서 가위로 자르고 철사로 동여매고, 나무의 괴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네 생각대로 만들어 가서야 되겠느냐? 한 번이라고 나무의 입장에 서 봤느냐? 네 자신이 아니라 나무의 입장에 설 수 있을 때 그 때 꽃을 키워라."
누구나 와서 보되,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다녀가라
책 마지막 부분,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제목이 나오게 된 배경도 흥미롭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염불암을 찾은 저자의 눈에 그동안 보지 못하던 낯선 것이 띈다. 제주도의 집 앞에 설치된 정낭처럼, 염불암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나무를 쌓고 그 위에 기다란 나무 하나가 걸쳐 있었던 것.
저자는 이것이 이곳을 출입하지 말아 달라는, 동안거에 들어 간 스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몇 해 전 부산 근교 기장에 있는 은적암 입구에서 봤던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글귀를 떠올린다.
"같은 말이라도 어찌 이리 다를까 싶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보되 흔적을 남기지 말고 그 안의 세상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다녀가라는 그 말. 엄격하고 강제적인 문구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책은 저자가 스스로 '하심'이라고 표현했듯이 참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심에 조그만 암자인 염불암이 놓여 있다. 염불암은 저자에게 생명이고, 자연이고, 깨달음이고, 스승이고, 친구이자 동반자가 아닐까. 책 제목 그대로 '아니온 듯 다녀가듯', 서로를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 본다.
| | 저자 안재인은? | | | |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 불교방송에서 일곱 해 동안 PD로 일하면서, 절에서 자라는 어린아이의 일상을 담은 '희종이의 봄 소풍', 고 박종철 10주기에 가족 및 주변인들의 회고를 담은 '사리암의 종소리, 그 후 10년', 경봉스님 추모 특집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와 같은 라디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뜻한 바 있어 방송 일을 접고 지금은 우리 문화 전반에 걸친 사진 작업과 글 쓰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2005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한국의 굿'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사진과 비디오 촬영 및 편집을 담당하였고, 2006년에 일연스님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삼국유사 특별전'(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일연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 저자 소개 글에서 | | | | |
덧붙이는 글 |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 안재인 글과 사진 / 도서출판 호미 / 236쪽 / 10,000원
첨부 사진 중, 염불암의 사계는 출판사 쪽에 요청해 원본을 받아 실었습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무단으로 복사해 가시면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