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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묘지에서 묵념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5·18민주묘지에서 묵념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강성관

"님께서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대통령으로서 '세기의 재판'을 통해 전직 두 대통령을 구속시켜 불의에 대한 항쟁과 대동세상을 만천하에 보여준 1980년 5월의 광주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신 바 크므로 5·18 제 단체는 '오월광주' 정신을 담아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5·18기념재단,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이 22일 낮 광주의 한 호텔 식당에서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에게 전달한 감사패의 내용이다. 이 감사패가 김 전 대통령의 손에 전달되기까지 적지 않은 우여곡절과 시간이 걸렸다.

짧게는 불과 몇 시간 전 김 전 대통령의 국립 5·18 민주묘지(아래 5·18 묘지) 참배 길에 한총련 소속 대학생 50여명이 감사패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전날(21일)에도 광주 진보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들이 5·18 제 단체를 찾아가 감사패 전달을 중단하라는 기자회견을 하려했지만 5월 단체 회원들이 주먹다짐을 하며 막아서 회견을 하지 못했다

길게 보면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1993년과 1995년에도 광주 북구 망월동 옛 5·18묘역 참배를 시도했지만, 학생과 유족의 반발로 무산됐다. 그 뒤로도 수차례 광주와 5·18 묘역 방문을 모색했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자신의 재임 시절 '국립묘지'로 승격시켜 놓았음에도 정작 본인은 이날 처음 5·18 묘지를 참배했다.

"이렇게 초청해주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이 흘러갔을 것"

5·18민주묘지로 들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
5·18민주묘지로 들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강성관
때문에 감사패를 받아든 김 전 대통령의 첫 인사말은 "감개가 무량하다"였다. "5·18 묘역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심정이 '진심'임을 강조했다.

"11년 만에 광주시를 방문했다. 여러 묘역을 돌아보며 너무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어서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 얘기도 안 나왔는데, 이제 조금 나아졌다. 정말 이것이 진실한 마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

김 전 대통령은 5·18 묘지를 참배하기에 앞서 방명록에 한문으로 '자유', '정의', '진실'이라고 적었다. 김 전 대통령은 "큰 생각 없이 그냥 쓴 시호였다"면서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렇게 땅에다 묻고 묻고 모르게 하려고 여러 가지 애를 써왔지만, 결국 역사는 그 진실과 정의를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가 5·18 3주년을 맞이해서 목숨을 건 23일 간의 단식을 시작할 때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썼다"며 "그 글이 한국 신문에는 일체 보도가 안 됐지만 세계의 모든 언론에 광주의 비참한 이야기들이 다 실렸다"고 회상했다.

묘역에서 묵념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묘역에서 묵념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강성관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때 광주지하철 착공식에 참석차 다녀간 후 처음이다, 11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며 "방금 다녀온 5·18 국민묘지를 찾은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고 말해, "정말 오랜만의 방문"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5·18 동지 여러분들이 이렇게 초청해주시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이 흘러갔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김 전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할 때 진정 이 나라에 정의와 진실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렸다"면서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할 때 다시는 이 땅에 정치적인 밤이 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하나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재임 시절의 공적을 부각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5·18 묘지를 둘러보면서도 "묘지를 만들 때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토지매입으로… 그런데 마지막에 광주 시민들이 협력을 잘해줬다"며 "전국에 국가 묘지가 7곳인데 광주 묘소가 제일 잘 된 묘지 같다,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 김 전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한다'는 기자의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웃으면서 "그것은 이야기하지 말자"고 손사래를 친 뒤, 자리를 피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정치정서의 미묘한 흐름 때문에..." vs. "학살자 비호한 환란의 장본인"

앞서 이날 기념패를 전달한 이홍길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이 한국과 광주의 민주화에 남긴 족적이 그렇게 큼에도 과거 한국 정치정서의 미묘한 흐름들 때문에 우리가 김 전 대통령의 진의를 다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그것이 서로 아픔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가 5·18 27주년을 맞아서 과거의 질곡, 매듭을 풀고 나아가야만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적 궤도를 만들어내고, 광주 5·18의 국내화 나아가 세계화의 기반을 더 튼튼하게 할 것 아니겠느냐"면서 김 전 대통령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8민주묘지 참배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한총련 학생들.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8민주묘지 참배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한총련 학생들. ⓒ 오마이뉴스 강성관

그러나 5·18 묘지 앞에서 피켓을 높이 치켜들며 김 전 대통령을 '환대'했던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1988년 여소야대라는 정국 속에서 5·18 민중항쟁의 진실이 밝혀지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김영삼은 광주학살 원흉 노태우와 3당 야합을 통해 진실 규명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대통령 권좌에 오른 김영삼은 '5·18을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며 광주학살자들을 비호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재임 시절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어떤 공적도 없었고, 오히려 IMF 구제금융 사태를 야기해 우리 경제를 초국적 자본의 이윤추구의 사냥터로 전락시킨 환란의 장본인"이라며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이러한 용서받지 못할 행적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뉘우침 없는 김영삼에게는 더욱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5·18 제 단체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5월 정신이 5월 단체 일부 상층의 잘못된 판단으로 훼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김 전 대통령 초청 및 감사패 증정 같은 사업은 5월 정신계승 사업과 무관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학생들의 반대 시위를 막기 위해 '5·18 묘지' 주변에는 경찰 5개 중대 600여명이 동원됐고 학생들이 계란투척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방패까지 준비했지만, 큰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이날 김 전 대통령에게 전달된 감사패 문구 초안은 시인 김준태씨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김준태씨가 작성한 초안은 다음과 같다. 최종안에서 '견결한 존경' 등의 문구가 빠진 것이 눈에 띈다.

"님께서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출발시킨 대통령으로 12·12와 5·17쿠데타에 이어 1980년 5월 18일을 기해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직 두 대통령을 '세기의 재판'을 통해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하고 불의에 대한 항쟁과 대동세상을 만천하에 보여준 광주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5·18특별법제정, 5·18신묘지 조성,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 제정 등 일련의 정책과 용단으로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다대함으로 5·18 제 단체는 무등산처럼 드높은 '오월광주' 정신과 김영삼 대통령을 향하는 견결한 존경을 함께 담아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김영삼#5.18 묘지#광주#감사패#5.18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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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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