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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이곳이 머큐리 베이를 방문하는 많은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다녀가는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에는 ‘가이드(Guide)’라는 번호판을 단 차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여행 가이드로 일하는 사람이 관광객들을 자기 차에 실어서 이곳에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주차장 바로 앞쪽,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시작되는 언덕 정상의 입구에는 관광지답게 이곳에 관한 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간이 안내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판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캐씨드럴 코브 및 그 주변 바다는 1993년에 해상보전지역(marine reserve)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고기잡이와 조개 채취 등 일체의 어로행위가 금지되어 있는 이 해상보전지역은, 서기 1350년경 폴리네시아로부터 자기 부족민들을 가득 태운 배를 타고 이주해온 헤이(Hei) 족장의 이름을 따서 ‘테-팡가누이-아-헤이(Te-Whanganui-A-Hei)’라는 길고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헤이(Hei)의 위대한 만’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묵었던 바닷가 마을 하헤이(Hahei)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 정철용
우리는 간이 안내소를 나와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언덕길로 나섰다. 몇 걸음 못 가서 시야 가득 장쾌하게 펼쳐지는 넓고 푸르른 바다 풍경이 우리의 발을 붙잡았다. 해변 가까이의 바다는 녹색을 띠고 있는 맑고 푸른 빛이어서 바다 속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저 멀리 수평선 근처의 바다는 햇빛을 받아서 마치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이 아름답고도 장쾌한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느라 자주 멈추는 아내와 나를 딸아이 동윤이가 재촉을 했다.

ⓒ 정철용
꼬불꼬불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어느덧 숲길로 변했다. 뉴질랜드 자생종 식물의 하나인 마누카꽃들이 길 옆으로 잔뜩 피어 있었다. 별 모양으로 생긴 그 꽃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쌉싸름한 향기가 우리의 코를 간지럽히고, 우리보다 더 자극받은 벌들은 붕붕거리며 꽃들 주위를 날아다녔다.

머리 위에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봄햇살이 제법 따가와서 십오 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도 이마와 등짝에 벌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숲길의 중간 중간에 마치 커다란 우산처럼 나뭇잎을 펼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고사리 나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정철용
그렇게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바다 구경을 실컷 하면서, 활짝 피어난 마누카꽃의 향기에 코를 맡기면서, 봄햇살에 흘린 땀을 고사리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식히기도 하면서, 30여 분 동안 걸어내려가 우리는 드디어 캐씨드럴 바닷가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거닐고 있는 그 바닷가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해 준 것은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는 아치 모양의 거대한 바위였다. 삼각형 모양으로 뚫려 있는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가니 내 이마와 등짝에 흘러내리던 땀들이 일시에 얼어붙는 듯 시원했다.

ⓒ 정철용
바닷가 바위에 이렇게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다는 것이 신기한 듯 동윤이는 히야, 하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순간, 히야아아아, 하고 천장에서 벽에서 연달아 울려 퍼지는 메아리! 이 바닷가에 ‘대성당(Cathedral)’이라는, 바닷가의 지명치고는 흔치 않은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 80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생긴 이 거대한 바위는 오랜 세월 파도와 비바람에 침식되는 동안 자신의 몸 속에 대성당과 같은 공간을 품게 된 것이다. 인간이 축조한 대성당의 어둠 속에서 사제의 기도와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높은 천장에 부딪혀 신비롭게 반향하듯이,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대성당 안에서도 우리가 지르는 탄성과 작은 속삭임까지도 다시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 정철용
자연이 만든 대성당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 놀이를 하는 딸아이를 놔두고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우뚝 솟아 있는 마름모꼴의 바위 하나가 바닷물에 발목을 적신 채 서 있었다. 정으로 쪼아서 깎아 놓은 듯 날카롭고 가파른 바위의 자태보다 그 바위 꼭대기에서 힘겹게 자라고 있는 나무에 더 오래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였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겠지만, 아예 이곳에서 하루를 즐기려는 모양인지 파라솔을 펼쳐 놓은 돗자리 위에 수영복을 입고 누워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모래 사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다보는 젊은 여행객도 있었다. 모두 취한 듯 꿈꾸는 듯, 잔잔하게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흰 거품을, 바다에 쏟아져내리는 눈부신 햇빛을, 그 햇빛을 받아 더욱 투명해지는 바다의 푸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정철용
아, 이렇게 멋진 곳인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여유있게 일정을 짰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간신히 수습해서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언덕 위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여간 무겁지가 않았다. 오르막길이기도 해서 그랬을 테지만, 아쉬운 마음이 내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입장료 한 푼 내지 않고 이런 아름다운 바닷가를 구경했다는 것이 조금 미안스럽게 여겨져서 우리는 간이 안내소에 마련되어 있는 기부금 박스에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집어 넣었다. 그렇게 모아진 기부금은 이곳 캐씨드럴 코브와 그 주변 바닷가를 때묻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보존하는데 쓰여진다고 하니 아쉬운 가운데도 마음이 뿌듯했다.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와 눈부신 햇빛과 푸른 파도가 봉헌하는 자연의 미사에 마음껏 동참할 것인가. 아쉬움을 안고 차에 오르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여행정보 안내책자에서 코로만델 반도를 묘사하는데 동원된 네 개의 형용사 중 하나인 ‘훼손되지 않은(unspoiled)’이라는 형용사는 바로 캐씨드럴 코브를 두고 한 말이었음을.

코로만델 반도의 보석과도 같은 관광지로 개발은 했으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그 주변 바다까지 해상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유명한 관광지인데도 인공의 흔적이라고는 주차장과 간이 안내소와 화장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조차도 그냥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져진 오솔길이었음이 새삼 의식되었다.

그러자 저 언덕 아래에서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의 음악이 바닷가 대성당의 어둠 속에서 아득한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내 귀는 자연의 소리에서 음악을 듣는 데는 익숙치 못해서 이명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만 귀에 가득할 뿐 알아듣지 못했다. 슬픈 마음 한 조각을 그곳에 두고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다녀온 코로만델 반도의 여행기 다섯번째 이야기입니다.


#코로만델 반도#캐씨드럴 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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