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근래 역사 소설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를 대입시킨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을 그대로 현실의 마당에 불러낸다.
소설 <남한산성>의 화두는 간단하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그러나 간단하지만은 않다. 치욕을 감내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치욕을 감내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이보다 더 인간을 괴롭혀 온 화두가 없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도 겪는 것이며,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 조정과 인조가 겪은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 딜레마는 공유하는 남성일수록 빠져들 만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화두를 기존 소설들은 애써 무시해왔다. 병자호란을 다룬 이전 소설들을 창피하게 만들었다. 명분과 치욕이라는 추상성에서 이시대의 현실적 고민으로 이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전도의 치욕은 과거의 숨기고 싶은 일일 뿐이었다.
물론 이 소설은 객관적이지 않다. 작가는 객관적인 위치에 섰다고 했다. 그러나 삶은 치욕이고 죽어서 사는 것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김상헌 같은 척화파의 논리는 하나의 실현 불가능한 허구에 불과하다.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가 현실과 삶을 이해하는 이다. 그의 말대로 강자는 약자를 자신의 마음대로 하기에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죽음과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듯, 주화파와 척화파가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 척화파와 주화파는 한 몸이다. 과연 극단적인 대결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그것은 공공 영역의 공식적 명분 싸움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개방을 주장하는 쪽에 대응해 개방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어야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낸다.
둘은 하나다. 삼전도의 치욕은 치욕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수용일수도 있다. '치욕'이라는 단어는 명분이 난무하는 조선시대 기록상의 형식적 표현일지 모른다. 그것을 또 하나의 전략으로 보는 소설이 더 탁월한 성찰일 수도 있다. 치욕에 매몰되기 때문에 치욕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소설 <남한산성>은 벗어나지 못했다.
치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극대화된 묘사 넘쳐
여기에서 문제는 극단화다. '치욕을 감내하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남한산성> 당시 상황을 참담하게만 그린다. 군사 전력과 의사 결정 과정은 물론 물자와 대응 체계는 형편없기 그지 없다. 당시 사람들의 심리는 무력감 그 자체이다. 그리고 자학한다. 치욕을 선택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을 돋보이게 하려는 극대화된 묘사와 수사들이 난무한다.
남한산성 현상의 또 다른 원인은 문체다. 그의 문체에 대한 찬사는 이제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 문체의 검객 같다. 문체 반정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수사로 사람들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칼도 그렇거니와 문체로 일어선 자 문체로 망한다. <남한산성>은 말이 난무하는 현실을 조롱한다. 구체적인 내용 없는 추상적인 말들을 향한 질타다.
<남한산성>에는 문체가 난무한다. 그것도 소설적 문체가 아닌 산문적 문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문체에 각 인물의 캐릭터는 위축된다. 캐릭터들의 구도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는다. 치욕과 함께 사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대결 구도는 모호하고 미려한 말들에 묻혀 버린다.
무엇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병자호란을 대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보인다. 당시의 의사결정체계는 너무 단순화되었다. 그것은 조선을 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왕을 중심으로 한 몇몇 의사결정권자의 구도로 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수많은 조직과 인물에 대한 정보는 넘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남한 산성 전략과 관련한 일련의 전략적 오류들이 약소국의 무기력과 자학감에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자학적 민족주의의 또 다른 모형을 제시한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가능성은 간과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따로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이 소설이 고전이 될 듯 싶기 때문이다. 강자,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좋아할만하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대중들의 현실적 고민을 더 부각시키려 했지만, 지식인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양자 간의 이분법적 구분은 민중에게 모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