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눈을 뜬 아침은 너무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토함산 쪽에서 햇살이 넘어와 숙소인 모텔의 창문을 밝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해가 길어진 탓인지 일찍 아침 햇살이 올라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어제는 비가 와서 여행하기가 불편했는데 맑은 햇살 아래에서 하루를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창문을 열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대릉원의 고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을 잔 숙소가 주변에서는 그래도 가장 높은 건물이어서인지 쉽게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가장 먼저 시선을 끌게 한 것은 거대한 언덕(산)을 연상케 하는 신라시대의 고분들이었다. 도시 한 가운데에 마치 공동묘지처럼 들어선 고분들이 1천5백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있다는 것은 잠시 시간의 오랜 흐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신라 역사의 시작과 끝 대릉원 지역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 그 오랜 역사의 도시가 왠지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 탓일 것이다. 경주는 빠른 도시화의 변화 속에서 잠시 비켜나 있다. 고등학교 때의 수학여행, 그리고 10년 전 신혼 여행길에 하루 밤 묵었던 때처럼 경주의 도심은 그리 크게 변화가 없는 듯하였다.
소위 역사도시에 대한 도시개발의 고도 제한이 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건물들이 들어서는 도시의 모습과는 분명 동떨어져 있는 것이 경주라고 할 수 있었다.
신혼여행 때도 경주역에서 내려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햇살이 창밖으로 비쳐오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여행을 하는 중이라 피곤하여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 햇살은 벌써 한참 하늘 위로 올라와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대한 무덤을 보고 고등학교 수학 여행길에 들렀던 천마총을 생각해 내었다. 그때는 아마 고대 왕들의 무덤을 모두 그렇게 크게 만들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혼 여행지를 경주로 택한 것처럼 우리도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것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처럼 경주는 신혼여행지로서도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이제는 유적지를 지날 때마다 눈에 띄던 신혼부부나 단체로 온 학생들의 모습은 그리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여행의 패턴이 변해서이리라. 경주 대신 이제는 중국이나 동남아로 떠나고 있을 테니까.
세 번째의 경주 여행은 지인과의 여행이었다. 역사유적에 대한 공통적인 목적의식 탓인지 그 의미가 매우 새롭게 와 닿았다. 여행은 목적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니까. 대릉원 쪽으로 가다보면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라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이 매우 크고 선명하게 서있다. 그것이 그동안 많이 변한 것 중 하나였다. 그렇게 성큼성큼 시간이 흘러 들른 경주,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는 처음이다 보니 경주가 오래된 도시라는 기억만 새겼다. 신혼여행 때는 서로의 모습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도는 아름다운 풍경의 배경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경주는 좀더 달라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 진리가 내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깨끗하게 정리되고 안정된 느낌은 문화유적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침 산책을 겸하여 대릉원에 들어섰을 때 소나무 숲 사이로 아침햇살이 들어 무덤에 잠들어 있던 왕들을 깨어나게 하는 듯 했다. 소나무 숲의 신선한 바람과 아침햇살,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행복감은 더 바랄 것이 없는 듯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줍는다’는 말이 실감나게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방을 한 탓인지 무료로 대릉원을 관람(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이어져 온 곳이니 오죽할까. 잘 다듬어진 왕들의 무덤사이로 아침햇살이 넘어 오고 있었다. 밤과 낮이 경계를 지나 낮의 시간으로 편입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릉원을 산책하면서 아침을 맞이하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관람료도 없으니까.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대부분 대릉원을 들러 천마총을 본다.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금관이나 천마도, 기마인물상, 유리잔과 같은 화려한 신라문화의 진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 유물들은 교과서와 많은 역사서들을 통해 많이 소개된 것들로 현장에서 이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 또한 새로운 의미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리잔은 멀리 아라비아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KBS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 유물들을 관람하려면 경주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대릉원 앞은 넓은 잔디위에 왕릉들이 잘 다듬어져 있고 그 뒤로 원시의 숲이 펼쳐져 있다. 반월성과 계림 숲이다. 이곳은 신라를 세우고 다스린 왕들과 신라인들이 잠들어 있는 신성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왕릉 중에 흥미로운 유물이 발굴된 곳이 미추왕릉이다. 미추왕은 신라 13대왕으로 김씨족 출신으로는 처음 국왕이 된 왕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토우부장토기(국보195)’는 당시 시대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토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원초적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가는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 같기도 하다.
미추왕은 김씨족의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으로 김알지는 서기 65년 지금의 계림 숲에서 한 마리 장닭에 의해 그 탄생이 알려진 설화적 인물이다. 계림 숲은 미추왕릉 부근이어서 이러한 설화적 상상력과 신라 고대사회의 모습들을 한꺼번에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마을 앞의 당산나무가 신성시되듯 계림 숲은 김씨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김알지의 설화를 간직하며 설화적 상상력과 함부로 침범하기 어려운 신성성을 느끼게 한다.
국가체제를 갖추어가는 초기의 건국설화는 어느 나라나 이러한 신성성을 부여하기 마련이지만 왕은 무릇 범인과 달라야 한다는 이런 이데올로기(?)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계림 숲과 함께 오랜 시간의 흐름을 반추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 반월성이다. 반월성은 반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궁성으로 남쪽으로 남천을 끼고 쌓아올린 성이다. 숲이 무성하여 미국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케 하는 자연공원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자리라고 하며 이 때문인지 신라왕조가 태어나고 멸망할 때까지 천년동안 영고성쇠를 이어간 곳이다. 반월성의 숲을 지나다 보면 석빙고도 만날 수 있다. 반월성의 동쪽으로는 안압지가 있다. 궁의 정원이라 할 수 있는 풍류와 휴식공간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신라역사의 중심 무대가 된 곳이 신라의 발원지인 계림 숲, 왕들이 살았던 반월성, 그리고 휴식과 놀이 공간인 안압지, 죽은 자들이 묻힌 대릉원 지역으로 하나의 커다란 일체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 부자집은 진골의 후예일까?
반월성의 서쪽 끝 남천가에 자리 잡은 집이 ‘최 부자집’이다. 최 부자집은 조선시대의 유교 유산으로 느껴진다. 바로 옆에 경주 향교가 있어서 이러한 느낌이 더 드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주인의 이름이나 당호를 따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자집이 이름이다. 왜 ‘부자집’이 집의 이름이 되었을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위 가진 자의 못 가진 자를 위한 기부라고 할 수 있는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에 대한 예칭이 아닐까?
이곳 최 부자집이 가문을 일으킨 것은 3백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이 부근은 고가들이 즐비해 옛 신라 때부터 귀족과 부호들이 살았던 곳으로 보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집도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이 말을 타고 다니던 경주, 그리고 최 부자집,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신라 고도의 전통 탓인지 최 부자집에서는 여느 고가에서는 보기 어려운 유물들이 정원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꽃무늬의 석조를 비롯하여 민가의 격을 뛰어넘는 유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 고도 신라의 궁성 곁에 산 덕이라 생각한다.
이곳 최 부자집 옆의 고가 마당에서 엄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대문 앞에 꼽거나 심는다고 하는데 이곳의 역사만큼이나 아름드리의 엄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 부자집은 여러 가지 트레이드마크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경주의 전통술이 된 경주법주다. 경주법주는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 부자집에 전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 부자집 앞에 경주법주를 만드는 고가가 있어 이러한 전통의 맥을 알 수 있다.
최 부자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요석궁’이라는 큰 간판이 들어서 있다. 이 요석궁은 전통한정식을 하는 음식점을 알리는 간판이다. 요석궁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 과부였던 공주가 살고 있던 궁(宮)의 이름으로 경주부의 향교 남쪽인 지금의 최 부자집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무열왕은 당시 원효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 이 궁으로 데리고 와 원효와 공주의 인연을 맺어 주었는데 이들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 설총이다. 설총은 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으로 이두를 집대성하여 우리글을 발전시킨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의미가 상업적으로 더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알고 나면 그 역사의 현장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