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의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국어기본법 제14조가 명령한 바다. 그런데 한미FTA 협정문은 영문으로만 작성했단다. 그래서 52일이 넘는 번역기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어느 나라 공무원인가? 협상도 영어로, 협정문도 영어로, 30여일간의 국회 공개도 영어로, 그러다가 이제야 한글로. 도대체 참여정부는 누구를 위한 누구의 정부인가?
이솝우화를 떠올린다. 여우가 두루미의 집에 갔다. 두루미는 호리병에 담긴 스프를 내놓았다. 두루미가 여우 집에 갔다. 이번에는 스프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아무도 먹을 수 없었다.
"60여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에게 순간 감동을 안겨준 어느 영화배우의 영화상 수상소감이다. 그렇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알기 쉽게 그리고 먹기 쉽게, 그리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글판' 봤다면 국회 기망, 영문판 봤다면 '국어기본법' 위반
노무현 대통령은 협상을 '징그럽게' 잘 됐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과연 한국 번역본을 보았을까? 아니면 영문을 보았을까? 아니면 요약 보고만을 보았을까?
협상이 완료된 4월 2일경 대통령이 한글 번역본을 볼 수 있었다면 이는 국회에 대한 기망이다. 늘 '행정부는 번역 중'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영문판을 봤다면 역시 대한민국 행정부는 '국어기본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셈이다. 비록 '일시적'일망정.
또한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관계부처의 장차관 등 공무원이나 이해관계 당사자들은 사실로부터 '먹통'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협상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협정문 완전공개를 통해 드러난 하나하나의 사실에 비춰볼 때 원문이 아닌 '자의적 요약편집본'을 통한 이해가 얼마나 가벼울 수밖에 없는지는 곧 증명되고 말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시장경제적 인간형은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을 중요한 징표로 삼는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로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합리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한미FTA의 근저를 이루는 인간형은 바로 이런 '합리적'이고 '이기적' 인간형이다. 자기결정의 전제에 '정보'가 있다. 정보는 의사형성, 의사결정의 기초자료이기 때문에 '알 권리'는 의사표현과 결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자주적·이기적 인간형에 알 권리는 모든 의사결정의 전제요 행복추구의 선행조건이다. 따라서 정보를 봉쇄하는 일,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자료를 제공하고도 알 권리를 충족시켰다고 강변하는 일,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위헌적 조치'이다.
알 권리 외치던 언론, 한미FTA는 알고 싶지 않았나
언론의 이중성도 불만이다.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조치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반대한다. 근거는 국민의 알 권리이다. 그런데 한미FTA 찬성 입장에 선 일부 언론들은 현재와 같은 방식의 협정문 공개에 대해 애써 눈감는다.
그렇다면 일부 언론들은 기자들의 취재의 자유, 언론기관의 알 권리가 국민의 알 권리를 대행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만의 전속적 권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국민의 알 권리가 곧 언론기관의 알 권리이고,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제 결론을 얘기한다. 먹지 못할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여우에게 있어 호리병에 담긴 스프는 음식이 아니다. 일주일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있는 난민에게 긴급구호라는 이름으로 고형식을 투하하는 일이 있다. 이 고형식은 도리어 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도저히 소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련의 한미FTA 협정문 공개 과정에서 이런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