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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골 촌구석에 살던 나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결석을 자주 했다. 남의 집 품삯 일을 하셨던 엄마 대신 젖먹이 동생을 돌봐야 했고 태풍이 휩쓸고 간 들판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학교가 무척 가고 싶던 때였다. 결석을 하다 학교에 가면 책이며 친구들이며 선생님까지 낯설었다. 동네 친구들이 꼬박꼬박 숙제를 알려줘서 다행히 숙제 때문에 매를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런 시절이 참 빨리도 지나갔다.

중학생이 된 후로 결석은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시골에도 학생은 참 많았다. 매일 아침마다 엄마들은 버스 기사 좌석에 가방을 올려줘야 했고 '오라이'를 힘차게 외치던 안내원 오빠는 양팔로 버스 문을 잡고 매달려 가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였다.

당시 많은 시골 학교 친구들의 목표는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거였다. 나도 그랬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나는 수업시간에 눈 크게 뜨고 선생님 쳐다보며 집중하는 것이 노력의 전부였다. 그 덕분인지 졸업 후 전주로 진학하는 학생들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친한 친구들은 다들 대학을 가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의 장녀인 나는 힘든 부모님과 줄줄이 딸린 4명의 동생들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고3 말쯤. 다른 친구들이 여기 저기 취업을 나갈 때도 난 여전히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이었다. 가고 싶은 회사가 있었다. 원서가 오지 않아 기다리던 중 느지막이 그 회사의 원서가 왔다. 나 말고도 많은 친구들이 지원을 했다. 면접도 보고 회사 견학을 한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94년 1월, 난 스무살에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셨다. 그리고 제일 미안해 하셨다. 찬바람이 불던 날 엄마는 시골 읍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작은 옷가게였다. 엄마는 곧 타지로 떠나는 내게 두툼한 외투를 사주셨다. 화려하지 않은 회색 외투가 그날은 참 화려하고 예뻐 보였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향을 떠나왔다.

첫 월급을 받고도 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다 명절을 맞이했다. 수원역에서 양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전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설렜다.

처음으로 내손으로 번 돈을 부모님께 쥐어 드리던 날 마음은 뿌듯함 그 이상이었다. 엄마는 쌀 한 말을 들고 방앗간으로 가시더니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를 만들어 오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얘기도 나누면서 앙증맞은 모양으로 잘라 놓았다. 인절미가 상자 한 가득 담겨졌다. 회사에 가져가서 나눠 먹으라며 푸짐하게 담아 놓으셨다.

휴가 마치고 회사로 들고 간 떡은 하루가 못 되어 동이 났다. 인절미 덕분인지 사람들과도 빨리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회사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입사 1년이 지나갈 쯤, 충남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게 싫었지만 한 가지 좋은 건 전라도인 집과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거였다. 쉬는 날만 되면 천안역과 전주역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근속이 길어지면서 부모님께 드리는 봉투도 두둑해졌다. 적금도 들었다. 전주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셋째의 하숙비를 감당해도 될 만큼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회사 생활 3년이 지나면서 모든 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럼. 아직은 여기서 더 벌어야지'하며 혼자 다독였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텨가고 있던 97년 10월, 추석 휴가를 나왔다가 돌아가는 날이었다. 부산에서 직장생활 하는 동네 친구가 왔다기에 보고 가려고 친구 집에 들렀다. 논에 갔다는 친구를 찾아 도로를 걸었다. 친구가 보였다. 버스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잊은 채 수다를 떨었다.

"야~, 너 이뻐졌다."
"남말 한다. 너 살도 많이 빠졌다 가스나야. 지금 가는 거냐?"
"어. 너 보고 갈라고… 어~어, 야! 버스 잡아 버스~!"

우리 둘의 옆을 휙 지나가는 야속한 버스. 시골이라 30분마다 1대 있던 버스를 놓쳤으니 잘못하면 전주역에서 탈 기차까지 놓치게 생긴 상황이었다. 집 떠나는 게 아쉬워 늘 시간이 닥쳐서야 짐을 챙기는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다가 친구랑 같이 지나가는 자가용을 잡기로 했다. 몇 대가 그냥 지나갔다. 우린 둘이 "야 니가 좀만 더 이뻤으면 진적 잡았겄다"하며 그 와중에도 농을 주고받았다. 한 10대가 지나갔을까 드디어 검은 자가용이 섰다. 10분도 안 걸리는 터미널이니 그냥 덥석 올라탔다. 인자한 인상의 남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터미널에서 어디 가시는데요?"
"전주 가서 기차 타야 되거든요."
"아 잘됐네요. 저도 순창 군청에 서류 제출하고 다시 전주 가거든요. 같이 가면 되겠네요. 괜찮죠?"
"어~, 그게 저~, 괜찮은데요. 그냥 터미널에서 내려주셔도…."
"제가 역까지 모셔다 드리죠, 뭐."

겁도 없이 나는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전주 역까지 가게 되었다. 전주 역에 도착해서 명함을 받아들고 차에서 내렸다. 기차 시간이 딱이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기차를 놓칠새라 "안녕히 가세요"라고만 하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기차를 탔고 2시간여만에 천안역에 도착했다. 기숙사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그분 명함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한건데 엉뚱하게 사소한 얘기까지 나왔다.

그때 내 나이 23살. 숫기 없던 나는 남자라면 겁부터 냈다. 남들 다하는 연애 한 번 못해 볼 정도였다. 남자를 사귈 생각이 없으니 누가 소개를 해줘도 그냥 그뿐이었다. 그래서 아마 생활이 더 무료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그분은 자기 동생을 소개 해주고 싶어 했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월차를 내고 전주로 내려갔다. 그분의 동생을 만났다. 그러나 느낌이 없었다. 그냥 'NO'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연락이 되었을 때 그분은 소개해줄 회사가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또 혹 했다. 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잠시 지루해 하긴 했지만 그만둘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말에 혹해서 그만둘 생각을 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급기야 일을 저질렀다.

휴무에 맞추어 다시 전주로 내려온 나는 몰래 면접을 보러 갔다. 겨우 총무부서 일인데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나는 뭔가 새로운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출근하라고 했다. 나는 결정을 못하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올라오는 무궁화호 기차 안에서 나는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에휴. 내가 왜 이러나. 미친 거 아닌가. 4년이면 짧은 세월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건가. 엄마가 아시면 뭐라 안 하실까. 회사에는 뭐라 말하나. 사표를 낼까 말까.' 머리속이 복잡했고 마음은 갈피를 못 잡았다.

늦은 시간인데 기차 안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입석표라 서서 가는데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를 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리를 식히려고 가져간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어 가는데 내 상황에 딱 맞는 내용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기회란 쉽게 오지 않는다. 기회가 왔을 땐 적극적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갑자기 없던 용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전주역에서 천안역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기차 안에서 나는 몇 년 할 고민과 생각을 다 해버린 듯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날 저녁 난 엄마한테 제일 먼저 털어놓았다. 엄마는 늘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셨는지 "그려 니가 결정했으믄 어련히 생각 했을라고… 집 걱정은 말고 니가 결정 헌대로 해라"고 하셨다.

다음날 직속상관인 선배언니에게 먼저 얘기를 했다. 깜짝 놀라는 선배는 "갑자기 일 잘하던 니가 무슨 일이야?"하며 놀라는 표정이었고 보고를 받은 대리님도 그랬다. 끝까지 그만두겠다는 내게 대리님은 "이번에 고과평가 젤 높은 직원으로 올려놨는데 왜 그래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하며 설득을 하셨다.

고과점수에 흔들린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마음이 쉽게 바꿔지지 않았다. 한번 결정을 하고나니 다니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막 IMF가 터지던 때였는데 나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무조건 때를 썼다. 대리님께 편지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퇴사를 했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으니 나 좀 설득해 달라는 대리님의 전화를 받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 나를 믿는다고 그 말씀만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요란 법석을 떨며 첫 직장을 떠나온 나. 후회하는 데는 단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회사를 소개해준 그분은 회사 실정도 잘 모르는 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는 자리엔 아직 직원이 나가지도 않은 상태였고 나는 그 직원을 밀어내다시피 온 직원이 된 것이다.

그곳은 각종 세금도 못 낼 만큼 힘든 회사였다. 나는 그분을 불러 원망하며 통곡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맘 굳게 먹고 잘 다녀야 했다. 참 힘들었다. 무엇보다 첫 직장 다니는 동안 금전 때문에 궁핍해 보지 않았던 나는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힘들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일을 그르친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회사는 힘들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내게 참 따뜻했다.

그렇게 힘든 회사 생활 1년이 다 되어갈 쯤, 열심히 일한다고 늘 잘 해주던 직원이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며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도 그냥 그랬다. 늦게까지 어울려 놀다 헤어질 때쯤 취기가 오른 남자분들을 태우기 위해 한 남자가 왔다. 다들 직장인이었는데 그 사람만 졸업을 앞둔 학생이었다.

그렇게 잠깐 보았던 그 사람이 지금 나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 같은 존재인 남편이다. 당시 삼겹살 집에서 상추 싸먹는 모습에 반했다는 남편은 팍팍하고 힘들었던 당시에 참으로 많은 힘을 주었던 존재이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늘 "내가 만약 기차 안에서 생각의 각도를 조금만 바꿨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남편을 만난 후부터는 "내가 만약 기차 안에서 생각을 바꿔 사표를 내지 않았다면…이런 남자를 못 만났겠지? 음, 그럼 안 되지 안 되지. 내 성격 감당할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어 그럼 그럼." 이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때 기차 안에서 수많은 생각들로 고민할 때만 해도 나는 뭔가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 같았는데… 쯧쯧,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잃는 게 있으면 반드시 얻어지는 것도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 세상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힘든 시절 운명처럼 만난 그 사람과 함께.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한 여행>에 응모합니다.


#기차#첫직장#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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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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