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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열린 카를로바 축제에 모인 주민들.
지난 19일 열린 카를로바 축제에 모인 주민들. ⓒ 서진석
우리나라 서양화계에서 많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화가 한 분이 내가 살고 있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에 들른 적이 있었다. 약 반나절 정도의 짧은 일정 속에서 타르투의 여러 가지 모습을 둘러보시던 그분은 타르투를 떠나면서 내게 "이 도시에서 차기 작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마을을 찾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분이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신 지역은 18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아름다운 구시청사나 에스토니아 지성의 상징인 타르투 대학교 건물이 아니라, 놀랍게도 이 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히는 수필린(Supilinn)이란 동네였다.

중심가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개발지역에서 벗어나 있어 허물어지는 나무집들이 즐비하고 길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아 요즘 같은 건조한 날에는 살수차가 수시로 지나가며 물을 뿌려야 하는 이런 동네가 대체 무엇이 그렇게 아름다웠길래 그림의 소재로 사용하고 싶어한 것일까. 정작 이 동네에는 수도시설도 잘 안돼있어 여전히 공동펌프에서 물을 길어먹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히 할렘가라고 부를만한 곳이다.

개발에 밀리는 정신의 도시 타르투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의 제2의 도시이다. 에스토니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수도 탈린의 손바닥만한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 다른 도시의 분위기나 아름다움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타르투는 에스토니아 최대의 대학이 위치한 대학도시이며, 외국인들이 건설한 탈린과는 달리 19세기 에스토니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문화 중흥의 선두적인 역할을 한 중심도시이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탈린이 '힘의 도시'라면 타르투는 '정신의 도시'라고 말을 한다. 에스토니아어로 힘과 정신은, 우리말 '님'과 '남' 같이 글자 하나 차이의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느낌이 좀 다르다.

그래서 탈린은 에스토니아를 지배했던 외부인들이 건설한 화려한 건물들이 중심이 된다면,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인들이 직접 손으로 건설한,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또 다른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말하자면,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에스토니아다운 도시가 바로 타르투이다.

그런 타르투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가장 잘 만들어 내는 것은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나무집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화가가 찬사를 보낸 수필린은 그래도 좀 많이 심한 감이 없지 않다.

카를로바 축제에 모인 주민들이 전통춤을 추며 행사를 만끽하고 있다.
카를로바 축제에 모인 주민들이 전통춤을 추며 행사를 만끽하고 있다. ⓒ 서진석

카를로바 동네 풍경.
카를로바 동네 풍경. ⓒ 서진석
허름한 빈민가에서 웬 축제?

게다가 그런 수필린과 비슷한 지역이 또 있다. 중심가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위치한 카를로바(Karlova)라는 마을이다. 여러 모로 사정이 조금 나은 느낌이 있지만 수필린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마을이다. 우선 허름한 나무집들이 즐비하고 수도시설이나 기반시설이 비교적 열악하다는 것이 공통점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서 타르투의 관광명소로 발전시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데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꽤 좋은 성과까지 얻고 있다.

타르투의 가장 열악한 지역인 이 두 지역은 매년 봄이면 성대한 축제를 벌여 외지 사람들을 자신들의 동네로 초청하고 자칫 할렘가로 변질될 수 있는 마을의 분위기를 예술과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올해도 변함없이 지난 19일 카를로바의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카를로바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주축이 되어서 벌이는 행사로서 하루동안 춤과 노래를 즐기는 아주 단순한 행사이다. 그러나 이런 초라한 동네에서 성대하게 벌어지는 이 축제를 궁금하게 여긴 많은 외지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의 관심사는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와 함께 이 마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카를로바는 보기와는 달리, 유럽 전체를 놓고 보아도 오래된 목조주거건물이 원상태로 가장 잘 보전되어있는 지역 중 하나이고, 그 규모는 북유럽 최대에 달한다. 집들의 재료가 나무이니까 보전과 관리가 어려울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 그러나 이 동네에 집들이 들어선 것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집들의 평균 수명은 무려 70~80년에 달한다.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이 마을은 거의 파괴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온 것이다.

오래된 집에 사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발크씨 부부.
오래된 집에 사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발크씨 부부. ⓒ 서진석
오래된 집에 살면서 얻는 이익도 많다

이 동네에 살면서 카를로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담당자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현재 집안 내부공사가 진행중이라서 좀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지만, 집 뒤편으로 널직한 뜰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내부구조가 아주 깔끔했다.

카를로바 축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마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5월 30일 창설되는 주민연합회를 준비하고 있는 라이보 발크씨가 사는 집 역시 거의 100년이나 된 집이다. 거기서 임신한 부인, 그리고 자녀 둘과 함께 살고 있다.

발크씨 부부의 말에 의하면 새집에 사는 것이 여러 모로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이런 오래된 집에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역시 많다.

"타르투면 대도시에 속하지만, 여기는 대도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도시의 매연이나 소음도 거의 없고, 게다가 거의 공원과도 같은 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카를로바 주민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무집도 거의 10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관리에 잔손이 많이 가기는 한다. 나무를 직접 베고 직접 손으로 페인트를 칠하고 하다보면 별다른 운동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건강에도 좋다."

카를로바를 알리는 것은 시의 정책적인 지원이나 지휘하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카를로바에 위치해 있는 루터교 성당의 성직자들의 중심으로 결성된 카를로바 문화연맹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종교적 성격은 전혀 내세우지 않았고 모든 업무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도 좋을만큼 역사적인 자신들의 마을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 알리고, 마을을 통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 그러한 활동의 목표이다.

아직 카를로바에 있는 여러 건물엔 수도시설이나 정화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다. 소련 시절, 저소득층 노동자 가족들이 대단위로 이곳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화장실이나 수도시설이 몇 가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로 만들어졌으나 독립 이후에도 상황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발크씨 내외처럼 비교적 수입이 있는 경우에는 꾸준하게 집을 고치고 수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이 마을 사람들은 보일러 시설이 없이 장작을 피워 난방을 해결하고, 공동화장실에서 용변을 해결한다. 그러나 이렇게 동네의 명성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타르투 시정부에서도 조금씩 마을 발전기금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은 노후된 벽을 새롭게 칠하고 단장하는데 드는 비용을 대주는 식이지만, 2012년까지 이 마을을 타르투의 역사지구 중 일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도 수립되었다.

서울 같으면 재개발이니 뭐니 해서 오래된 지역을 허물고 새로 짓자는 바람이 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몇 년전 카를로바의 일부를 한 부동산 업체가 매입해서 고층빌딩을 지으려 하자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수십 년 된 오래된 나무집들이 들어선 카를로바 한복판에 들어선 반짝반짝한 유리건물이 동네 이미지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길에 포장이 거의 되지 않는 수필린, 건조한 날에는 이렇게 살수차가 물을 뿌려야할 정도로 먼지가 상시 풀풀 날린다.
길에 포장이 거의 되지 않는 수필린, 건조한 날에는 이렇게 살수차가 물을 뿌려야할 정도로 먼지가 상시 풀풀 날린다. ⓒ 서진석
야채들이 모여 사는 수프마을

카를로바는 그래도 동네 전체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는 등 정비가 좀 됐지만, 수필린의 상태는 더욱더 열악하다. 카를로바와 마찬가지로 수필린의 집들 역시 100년 정도 되는 오래된 집들이다. 타르투 시를 가로지르는 에마 강변에 위치한 이 동네는, 원래 늪지대였던 곳을 막아서 만들어진, 말하자면 타르투의 괭이부리말 같은 곳이다.

수필린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19세기부터 이곳에 몰려든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주로 야채나 과일을 재배해서 내다팔았다. 집들이 늘어나면서 마을의 형태가 잡혀가자 사람들인 거리 이름을 그들에게 친근한 야채이름으로 채워나갔다. 그래서 수필린의 거리들은 감자, 멜론, 콩, 완두콩 등 야채와 과일이름으로 붙여졌고, 거리 이름 대부분이 수프에 들어가는 야채들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이름은 에스토니아어로 수프마을을 의미하는 수필린이 되어버렸다. 그 후 가난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 에스토니아의 보헤미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연이 녹아있는 마을의 주민들은 2002년 자발적으로 주민연합회를 조직했고, 그 해 수필린 축제를 개최해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여전히 발전이 더디고 조건이 취약하긴 하지만, 그런 크고 작은 축제를 매개체로 해서 동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20세기 중 후반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이 곳에서 몇 편 촬영되면서 관광객들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수필린 가운데를 지나가는 완두콩(Herne) 거리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대부분의 길이 포장이 되어있지 않고, 여러 집들이 대다수 공사가 시급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흉물스러울 수 있는 동네이지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조건과 동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마을 사랑이 큰 힘을 발휘했다.

수필린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그 서양화가가 나에게 해준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란 단순한 건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무리 낡고 우중충한 집이라 하더라도 살던 당시에는 지긋지긋하고 떠나고 싶은 공간이었을지 모르나 세월이 지나면 어느 샌가 자기도 모르게 추억의 한 부분에 앙금처럼 남아서 다시 그곳을 찾아가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그곳이 좋았건 나빴건, 단지 그곳에 자신이 살았다는 것 때문에 누구나 집을 동경하게 되며, 그것 때문에 집이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훌륭한 모티브가 된다."

1년이 멀다하고 휙휙 바뀌어 버리는 우리나라의 모습. 마치 변화를 겪지 않고는 발전이 둔화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분위기. 급속한 발전과 역사적 가치의 보존은 언제가 공존하는 문제들이겠지만, 급속도로 변화하는 우리나라의 대도시에서 항상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소중한 추억거리가 사라지기 때문은 아닐까.

수필린 동네 표정
수필린 동네 표정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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