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앙숙으로 남을 것 같았던 미국과 이란이 27년 만에 만났다.
라이언 크로커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와 하산 카제미 코미 이라크 주재 이란대사는 28일(현지시각)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의 회의실에서 대사급 양자 회담을 했다.
지난 1979년 3월 31일 친미 팔레비 왕정이 이슬람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그해 11월 4일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미 대사관 점거 사태가 장기화하자 미국은 1980년 4월 7일 이란과 국교를 단절했다.
그해 4월 25일 미 특공대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이란으로 잠입하려 했으나 헬기 추락으로 전원이 사망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런 사건에 극심한 경제 불황까지 겹치면서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해 말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 재선에 실패했다.
27년 만에 양자 대화를 하기 위해 미국과 이란 대표들은 28일 오전 10시 30분께 바그다드의 이른바 '그린존'에 위치한 말리키 총리의 집무실에 나타났다. 말리키 총리는 환영 인사를 한 뒤 먼저 자리를 떴고, 크로커 미국 대사와 카제미 이란 대사의 양자 회담이 4시간 동안 진행됐다.
겉으로는 이라크 총리 집무실에서 회담을 열어 3자회담의 면모를 갖췄으나, 실제로는 미-이란 직접 대화가 된 것이다.
회담이 끝난 뒤 양쪽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으나 '긍정적인' 회담이었다고 평가했다.
크로커 대사는 "이란이 미국과 이란, 이라크가 참여하는 3자 안보기구를 제안했다"며 "나는 이를 행정부에 전달해 고민해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크로커 대사는 "이란 앞에 이라크에서 그들의 행동과 관련한 직접적이고 특별한 우려를 제기했다"며 "이란은 이라크와 관련한 태도를 바꾸고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무장과 재정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카제미 이란 대사는 "몇몇 문제들이 제기되고 연구됐고 이는 긍정적인 조치로 생각한다"며 "한 달 안에 미국과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카제미 대사는 "이란은 새로운 군사 및 안보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이라크 보안군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제공할 의지가 있다"며 "미국이 이라크에서 했던 똑같은 시도는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란은 미국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된 이라크의 사회기반시설을 복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이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이란의 지원 중단을 요구한 것에 대해 이란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오늘날 혼란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미 중동 정책 변화의 상징
미국과 이란의 이번 회담은 결국 탐색전 수준에 그쳤고 AFP통신은 "양쪽이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난만 교환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단발성 만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달 안에 다시 회담을 열기로 한 만큼 앞으로 더 진전된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만남 자체가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번 회담이 주목을 끄는 것은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의 변화, 나아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 변화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는 데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란은 북한·시리아와 함께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부른 국가다.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과의 직접 대화는 없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은 이란 핵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연합 국가를 대신 내세워 협상을 벌였을 정도로 양자 회담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북한과의 핵 협상을 양자협상으로 하지 않기 위해 6자회담을 추진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부터 미국은 북한과 사실상 양자 회담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양자회담에 나선 것은 일시적 상황 모면을 위한 '쇼'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란과 양자대화에 나섬으로써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과의 대화가 단지 임기응변식 대응은 아니라는 점이 더 분명해졌다.
더구나 이번 이란과의 대화는 미국이 먼저 제의해서 이뤄졌다. 미국은 테헤란 주재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 이란과의 직접 대화를 제의했고, 지난 5월 14일 고든 존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이 공식화했다.
또 하나는 이란과의 양자 협상은 결국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출구전략'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초당파적 기관인 이라크연구그룹(ISG)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오는 2008년 초까지 미군 철수를 권고했다. 이를 위해 ISG가 강력하게 권고한 사안 중 하나가 이라크 안정화를 위해 주변 국가인 이란 및 시리아와 적극적으로 협상하는 것이다.
당시 ISG는 "이란과 시리아의 능력 및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미국은 건설적으로 이들과 관여(engage)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3433명의 미국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2만5549명에 이른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미군 철수는 없다고 버티고 있으나 28일 미 <뉴욕타임스>는 부시 행정부가 내년 중반까지 이라크 주둔 미군을 현재 14만6천여명에서 10만여명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 이란-미 단교 계기 된 미 대사관 인질사건 | | | |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국교 단절 27년 만에 28일 대사급 회담을 하는 이란과 미국의 단교 계기는 지난 1979년 미 대사관 인질사건이다.
이란에서는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팔레비 왕조의 58년에 걸친 장기 통치가 이뤄졌다.
1941년 즉위한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2세는 여성 참정권, 국영기업 민영화, 토지개혁 등 서구식 근대화인 이른바 '백색운동'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시아파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큰 마찰을 빚었다.
이들 원리주의 세력에겐 이슬람의 전통과 교리를 버리고 친미ㆍ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용납할 수 없는 통치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1977년 10월 팔레비 2세 암살기도 사건이 적발되면서 팔레비 2세는 비밀경찰 조직인 '사바크'를 창설, 반정부 세력은 물론 일반 국민의 자유까지 극도로 탄압한다.
미국은 친미적인 팔레비 왕조를 지원하는데 이는 원유 대국인 이란을 석유의 안정적 공급처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팔레비 왕조를 떠나 1978년 1월 시아파 성지 콤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프랑스로 망명했던 호메이니가 귀국하면서 초당파적 반정부 전선이 형성됐다.
전국적 반정부 시위와 파업투쟁을 견디지 못한 1979년 1월 팔레비 2세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그해 3월 31일 세계에서 최초로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성공한다.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로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한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을 지원한 미국을 강하게 비난하며 팔레비 왕조를 깎아내리면서 국민 단결을 도모, 혁명 후유증을 수습한다.
1979년 10월 이집트 도피 생활 중 객사한 팔레비 2세의 시신이 미국 뉴욕의 병원으로 이송되자 이란의 대학생들은 11월 4일 미국 정부에 그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며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억류한다.
이에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 원유 수입을 중지하는 강수를 뒀고 이란도 대미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 대응을 하며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미 대사관 점거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장기화하자 미국은 1980년 4월7일 이란과 국교를 단절하고 4월 25일 인질 구출작전을 폈지만 실패한다.
이 대사관 점거 사건은 1981년 1월 알제리의 중재로 미국 인질이 석방되면서 444일 만에 끝난다.
이후 이란과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앙숙'으로 남게 된다.
카터 대통령이 1980년 말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선에서 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지 못한 과오가 꼽힐 정도로 이는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
반미 노선을 주장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이란 대통령이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그가 대학생 시절 미 대사관 점거사건에 참가했다는 근거가 불분명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hskang@yna.co.kr (끝) / 연합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