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특산품 순무 사가지고 가세요. 맛도 특별하답니다."
화장실 입구에서 할머니 한 분이 야채가 아니라 과일처럼 불그스레한 순무를 수북이 쌓아놓고 손님들을 부른다. 그러나 일행들은 이제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어서 순무를 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강화 역사관이다. 역사관은 전에 들렀었기 때문에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강화읍내 오른편으로는 대몽항전을 위해 고려시대에 세워졌던 고려궁터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버스가 정차한 곳은 외포리 포구. 배를 타고 석모도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주차장에는 먼저 온 관광버스들과 승용차들이 많다. 마침 석모도로 건너가는 배가 들어와 있었지만 우리들은 다음 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게 앞에 커다란 새우깡들이 수북수북 쌓여 있다. 석모도 뱃길의 명물인 갈매기들에게 던져주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사간다는 이곳 최고의 인기(?)상품이다.
곧 우리 차례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릴 필요 없이 그대로 배를 탔다. 배가 출항하자 예의 수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많은 갈매기들이 배를 뒤따른다. 녀석들은 배 주변을 날며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느라 아우성이다. 대부분 승용차에서 밖으로 나온 여행객들은 저마다 한 개씩 새우깡봉투를 들고 나와 갈매기들에게 던져 준다.
"저 갈매기들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아야하는데 저렇게 새우깡에 길들여져서 괜찮을지 몰라? 인스턴트식품이 저들에게도 좋은 식품은 아닐 텐데 말이야."
일행 중에서 누군가 갈매기들을 걱정한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여행객들이야 재미삼아 던져주는 것이지만 그 맛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에게는 어쩌면 생존권이 걸려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도 끼룩거리며 뒤따르는 갈매기 떼는 정말 대단한 볼거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섬과 섬 사이가 좁은 해협이어서 배는 금방 석모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버스는 그대로 배에서 나오자 보문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산자락은 어느새 짙은 녹음으로 싱그러운 모습이고 길가의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지만 이양기라는 기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옛스러운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그때 버스 안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구성진 목소리로 홀로아리랑 한 가락을 뽑아 올린다.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실려 바라보는 모내기 중의 들녘풍경이 어느 듯 잊고 살았던 기억 속의 옛날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해명산 고개를 넘어 잠시 달리자 보문사 입구다. 우선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느새 시간이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해물탕이었다. 그런데 반찬 중에 못 보던 나물이 나왔다. 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바다 갯벌에서 자라는 나무제 나물이라고 한다.
점심을 먹은 후 일단 바닷가로 나갔다. 저 멀리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들은 조용한 정적에 감싸인 모습이고, 썰물로 물이 빠진 갯벌엔 작은 게들이 살살 기어 다니는 모습이 예스럽다. 개발의 열풍은 이곳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한 곳엔 전에 보지 못했던 선착장이 들어서 있고 길가엔 많은 음식점들과 함께 새로 짓는 건물들도 보인다.
"절에서 웬 입장료를 받는데유?"
지방 사투리를 쓰는 50대 관광객 몇 명이 불평을 하며 내려오는 보문사 입구는 몰려든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일주문 앞 매표소에서는 입장권을 팔고 있었는데 어른은 1인당 2천 원씩이었다.
바닷가를 돌아왔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일주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버스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찰입구 도로 옆 상추밭에서는 60대 노인 하나가 상추를 뜯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고 평화롭다.
도로 옆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노점상들을 보며 내려오다가 보니 낯선 나물이 바구니에 담겨 있다. 무슨 나물이냐고 물으니 나무제 나물이란다. 점심에 식당에서 맛본 그 나물이었다.
몇 사람이 그 나물을 산다. 나물 맛이 좋았던 모양이다. 버스에서는 이미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은 항상 이렇게 주마간산이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렸다간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도로가 상당히 정체되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는 그래서 서둘렀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 승선할 수 있었다. 갈매기 떼는 변함없이 뱃전을 맴돌며 승객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느라 아우성이었다.
외포리에서 내린 버스는 다시 강화 섬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등사가 왼편으로 저 만큼 바라보이는 길을 달려 신미양요의 슬픈 전적지인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 주차장에도 이미 많은 관광버스들이 주차해 있었다.
광성보는 사적 227호로 지정된 곳으로 강화도 해안에 산재하고 있는 일명 12진보중의 하나로서 강화해협(일명 염하)를 사이에 두고 김포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광성보는 구한말(1871년) 신미양요의 치열한 격전지로서 미국의 로저스가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했을 때 이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져 조선군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 이하 수많은 병사들이 장렬하게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 입구에는 하얀 불두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고, 성안에는 당시의 대포 3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광성보를 둘러보고 바닷가에 있는 용두돈대로 향했다. 바닷가로 불쑥 솟아나온 모습이 용머리 같은 모습이어서 용두돈대라고 했다는 이곳은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다.
돈대 바로 앞으로는 염해라고 부르는 김포와 강화 사이 해협이 흐르는데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 거센 물살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 섬에 이궁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손돌이라는 뱃사람의 슬픈 전설로 손돌목이라는 다른 이름의 해협으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손돌목의 전설은 이렇다. 용두돈대 바로 밑을 흐르는 곳이 바로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파도가 험하기로 유명한 손돌목이다. 때는 고려 21대 희종이 몽고군의 침략을 피하여 자연도(용유도)로 뱃길을 재촉할 때였는데 유능한 뱃사공으로 이름이 알려진 손돌로 하여금 배를 몰게 했다.
그런데 음력 10월 20일 이곳 용두돈대 밑에 당도하니 물살이 거세고 바다가 막힌 곳으로 자꾸 배를 저어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왕은 손돌 뱃사공을 역적으로 의심하여 목을 베었다.
손돌은 억울하게 죽으면서 왕에게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서 바가지가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바다가 트일 것이다"고 일러주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배가 나아가지를 못하자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이곳을 통과한 왕은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손돌을 김포 쪽 강변 야산에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주게 하였다.
그래서 김포 쪽 덕포진에는 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손돌의 무덤이 있으며 이곳 용두돈대와 덕포진 사이의 해협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매년 음력 10월 20일경이면 강한 바람과 함께 강추위가 오는데 이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해안의 수많은 보와 진 같은 군사시설이 자리 잡고, 고려시대의 왕궁터와 조선시대의 서고가 자리 잡았던 곳이 바로 이 강화 섬이다. 또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귀양살이를 한 곳도 이곳이다. 그래서 강화섬은 수많은 역사유적과 함께 많은 전설이 깃든 섬이다.
"아세요? 이 섬이 몽땅 박물관이라는 거…."
이 섬이 고향이어서 자주 찾는다는 일행 한 사람이 우리들에게 물었다. 강화섬을 둘러보고 김포의 대명항에 잠깐 들렀다 돌아오는 길가에는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과 모내기를 끝낸 들녘 풍경이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