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아이 하나가 무기를 들고 달려가는 장정들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주저앉았다. 하달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지만 침착하게 아이를 일으켜 세운 후 아이가 알아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땋은 머리를 한 자들이 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 놓고 있습니다.”
하달은 그 말에 마음 속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곁으로는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들이 문을 어떻게 열었느냐?”
아이는 그 말에 파랗게 질려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이...... 그것이......”
아이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장정들은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지 않는 하달이 답답했지만 하달은 그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괜찮다. 천천히 말해 보거라.”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신 후 한꺼번에 말을 툭 토해 놓았다.
“무녀 누나가 미친 듯이 날뛰더니 문을 열었습니다.”
그 말에 그때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던 하달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여러 상황을 예상해온 하달로서도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자.”
남쪽 문에 다다른 하달과 일행은 너르족들에 둘러싸여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일가 친족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금방 전의를 잃고 말았다. 그 앞에는 유란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사람 짐승이었다네 어허디뎌 어히랴 디려. 아이가 둘이 있었지 아이가 둘이 있었지. 그 아이 이렇게 춤을 추고 마을로 돌아 왔다네......”
“유란아! 이게 무슨 짓이냐!”
하달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유란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제 모든 게 끝났소. 두레마을은 우리 너르족들의 것이오.”
언제 들어왔는지 수걸이 앞으로 썩 나서자 하달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와 함께 하달은 왜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급히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이미 계획된 일이었어. 저들이 목책을 넘는 척 공격을 하고서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것이군. 하지만 왜 하필 유란이 이랬단 말인가. 설마......’
“두레 마을의 장로님. 이제는 원한을 잊고 두 족속이 손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전 유란과 가약을 맺은 지 오래입니다.”
수걸이 하달의 흐릿한 판단에 빗장을 지르는 말을 했지만 하달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아버님, 정녕 모르겠습니까? 전 누이와 혼인을 맺고 한때 사나움을 다스리지 못한 부족을 평정한 뒤 아버님을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열 때입니다.”
하달은 수걸의 얼굴에서 땋은 머리 너르족들에게 잡혀가던 아내의 얼굴을 엿보았다. 그와 동시에 하달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 도적놈들! 더 이상은 안 된다!”
하달은 괴성을 지르며 수걸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손에 쥔 돌도끼를 내려쳤다. 둔탁한 느낌과 함께 피가 튀며 쓰러진 것은 춤을 추던 유란이었다.
“안돼!”
눈이 뒤집어진 수걸이 보기 드문 번쩍이는 칼을 뽑아들고 하달의 목을 쳐 버렸다. 하달은 목에서 선혈을 내뿜으며 서서히 쓰러졌다. 수걸은 칼을 집어 던지고 쓰러진 하달과 유란을 동시에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아니야......! 이러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야!”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가는 하달은 허공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걸은 이제 공포에 질린 두레 마을 사람들을 아래에 두고 큰 세력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구석에는 도저히 풀 곳이 없는 증오가 불타올랐다.
수걸은 죽은 유란의 시신을 끌어안고 분노와 슬픔이 범벅이 되어 하염없이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하달의 목은 잘려 두레마을의 입구에 내걸렸지만 그 육신은 고이 장례가 지내져 마을 어귀에 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유란의 시신은 수걸이 안고 간 후 아무도 묻힌 곳을 알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제2화 '남부여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화. 두레마을 공방전
2화. 남부여의 노래
3화. 흥화진의 별
4화. 탄금대
5화. 사랑, 진주를 찾아서
6화. 우금치의 귀신
7화.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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