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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과 관련한 항소심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30억원을 선고받은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왼쪽 끝)과 박노빈 현 에버랜드 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사수정-1일 오후 3시50분]

"이렇게 해도 나중에 (재용이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90년대 후반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무리하게 '삼성 지배권 승계작업'을 강행하는 것을 보며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씨가 아들을 걱정하며 한 말이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이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며, 홍씨의 우려는 적중했다. 예상을 못했던 바도 아니니,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솔직히 사과·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노력을 할 시점이다.

하지만 삼성 전략기획실(옛 구조본)이 재판이 끝난 뒤 보인 반응은 전혀 딴판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와 같은 증여문제로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 깊이 반성한다"는 지난해 2월 '대국민 사과'를 무색케 한다.

1년 전엔 "깊이 반성한다"더니

삼성은 급기야 대법원에서는 꼭 이길 수 있다며 상고까지 했다. 대법원에서는 기존 판례를 다 뒤엎지 않는 한 삼성이 이기기 어렵다는 법조계의 일반적 관측을 삼성 전략기획실만 모르는 것일까?

삼성 전략기획실이 발표한 장문의 보도자료를 보면 더욱 어이가 없다. "그룹 차원에서 지배권 이전 목적으로 공모가 있었다"는 검찰의 주장을 법원이 배척했다고 강변했다. 명백한 왜곡이다.

재판장은 그룹 차원의 공모에 대해서는 별도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관련 부분이 검찰의 공소사실에 없는데다, 그룹차원의 공모와 상관없이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의 유죄는 분명하다는 취지였다.

검찰이 전환사채 헐값발행으로 인한 회사의 손실액을 최소 970억원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법원이 90억원으로 계산한 것을 두고 마치 큰 승리나 거둔 것처럼 강조한 것도 우스꽝스럽다. "회사손실이 전혀 없었다"는 삼성 전략기획실의 주장은 정작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잊었단 말인가?

말이 나온 김에, 항소심 재판부의 용기있는 판결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검찰이나 사법부는 국민들로부터 '재벌 눈치보기'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왔다. 솔직히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순간까지도 과연 '재벌=성역'이라는 우리사회의 두터운 벽을 깰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재판부의 소신판결로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 구조본을 에버랜드 사건의 '몸통'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도 못하고, 항소심이 끝난 뒤에도 향후 수사방침조차 밝히지 못하는 검찰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에버랜드 판결 이후, 삼성은 한화와 닮은 꼴

▲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 내걸린 삼성 깃발.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에는 전혀 차질이 없을 것이라는 삼성 전략기획실의 주장도 안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환사채 헐값발행이 위법이라는 판결이 났지만, 10년 전 이미 이뤄진 재용씨의 주식취득이 원천 무효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재용씨가 에버랜드 주식을 계속 보유한다고 해서, 궁극적 목표인 경영권 승계를 원만히 이루고, 부친인 이건희 회장처럼 경영전면에 나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상실한 채 삼성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을 때 국민이 이를 용납할 것이며, 기업 내에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제는 글로벌경영시대다.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며 세계무대에서 무한경쟁을 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재용씨가 삼성의 최고경영자가 되어 국제무대에 섰을 때, 외국의 기업인이나 언론 등에서 불법적인 세습 문제를 들고 나오면 과연 얼굴을 들 수 있을까?

삼성 전략기획실의 모습은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한화그룹의 현명치 못한 대응을 떠오르게 한다. 한화는 사건이 표면화된 뒤에도 국민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반성을 통해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범행 은폐와 수사축소 로비, 심지어 김 회장을 미화하는 홍보로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삼성이라면 전혀 달랐을 것"이라고 혀를 차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에버랜드 판결 이후 삼성을 보면 한화와 형님 아우 격이다. 삼성 안에서도 답답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검사 출신이 주축인 삼성그룹 법무팀이 강경대응 기조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화와 닮은꼴이다.

에버랜드 재판을 바라보며 국민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삼성 때리기'가 아닐 것이다. 재벌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2·3세에게 재산과 경영권을 넘기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선진기업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보여 달라는 것이지 않겠나?

재용씨로의 세금 없는 대물림이 도마 위에 올라있지만, 솔직히 이건희 회장은 더했다고 한다. 삼성의 전 고위임원은 "재용씨의 경영권 세습 수법은 지난 80년대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썼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하다"면서 "이건희 회장이 1988년 취임할 때 납부한 상속세가 고작 176억원에 불과했던 비밀도 거기에 있다"고 증언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도 삼성이 재용씨로의 세금 없는 승계를 위해 실행한 수많은 변칙, 불법 행위 중 한 조각에 불과하다. 그래도 과거처럼 재벌해체, 삼성해체를 주장하는 국민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삼성으로서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재용씨, 사태해결에 적극 나서라

삼성 전략기획실의 강경대응은 삼성 내부 역학구조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당시 사건에 직접적으로 책임있는 인사들이 아직도 삼성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그들은 강공책만이 자신들의 자리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리석다. 그들은 삼성이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 뒤, 책임질 것은 지고 국민의 선처를 구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어리석은 대응으로 끝내 기회를 놓칠 때 과연 누가 가장 손해일까? 다름 아니라 삼성의 후계자로 불리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다. 삼성 구조본이 지난 90년대 후반 에버랜드를 포함해 삼성의 비상장계열사 주식을 재용씨에게 헐값에 넘길 때, 그는 20대 해외유학생 신분이었다.

재용씨는 삼성의 편법·불법 세습작전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범죄행위에 직접 관여돼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법행위의 최대 수혜자로서 사태해결에 적극 나설 책임이 있다. 스스로도 살고, 그래서 삼성도 살고, 또 대한민국 국민도 사는 상생의 해법을 찾는 것이 그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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